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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80] 계몽주의와 교회

by 세포네 2005.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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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는 베이컨(위 왼쪽부터 시계방향)과 홉즈로부터 시작돼 칸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을 낳으며 그 사상이 더욱 깊어졌다. 데카르트(아래 왼쪽)의 합리론은 계몽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기도 했다.

 

 

대결속 교회 개혁의 단초 얻어

『계몽이란 인간이 자기 탓으로 초래한 미몽(迷夢) 또는 미성숙(未成熟)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미성숙이란 자기 자신의 이성을 남의 도움 없이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기 이성의 결함 때문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결단과 용기의 결함 때문인 경우이다』
칸트는 「계몽주의」라는 말이 혼란을 일으키는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개탄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따라서 계몽의 목표는 『첫째, 인간을 그 후견인(後見人)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둘째, 인간이 자기 이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간결하지만 핵심적으로 지적한 것과 같이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진리의 척도이며 종교의 신성함까지도 계몽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결국 계몽주의는 종교, 특히 계시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인간에게 타율과 미성숙을 강요한다고 보아 그 일차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계몽주의와 계시종교 사이에는 처음부터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로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적대적
계몽주의는 영국에서 일어나 프랑스를 거쳐 독일, 전유럽을 휩쓸었다. 베이컨, 홉즈로부터 시작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까지 계속되는 동안 이 사조는 새로운 이론을 낳고 더 깊은 시각에서 계몽사상이 표출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로크의 계몽사상이 허치슨, 흄, 티달, 콜린스, 기본 등에게로 이어졌고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볼테르,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 돌바크, 콩디약으로 이어지면서 활짝 꽃을 피웠고 유물론적 입장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된 계몽사상은 이탈리아의 「경험 철학」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독일에서는 멘델스존, 니콜라이, 에베하르트, 헤르더 등에 이어 칸트가 탄생한다.
18세기 후반까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던 계몽주의는 낭만주의에 밀려나기 시작했지만 근대사 안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전진적 인간 정신의 발전 단계로서 전 유럽의 사상을 북남미까지 포괄한 마지막 거대한 정신운동이었으며 낡은 사고와 생활 양식에서 중세기적 속박을 극복함으로써 처음으로 근대적 발전을 가능케 했다. 학문과 근세 문화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은 계몽사상에 크게 근거했던 것이다.
역사.사상.문화적 배경
계몽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프랑스의 루이 14세로 대표되며 18세기까지 계속된 절대 군주제를 들 수 있다. 신의 대리자인 군주를 거스르는 것은 독성죄였다. 그리고 17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종교개혁, 종교전쟁을 들 수 있다. 종교를 빙자해 서로를 살육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종교를 근본적으로 불신할 빌미를 주었고 이는 인간 이성에 삶의 토대를 두고자 하는 사조를 야기했다.
사상적 배경으로는 근대의 경험론과 합리론을 들 수 있다.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은 잘못된 표상, 즉 우상들을 제거하고 인간 의식에 잠재한 미신들을 타파하려 했다. 인식의 유일한 원천은 경험이고 귀납법으로 얻어낸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된 합리론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내 이성으로 명확하게 인식되는 것만이 진리이며 이성만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문화적으로는 14세기와 15세기 유럽에 영향을 준 르네상스가 그 배경이 됐다. 이전의 학문과 권위, 원리에 반대하며 갈릴레이가 제시한 새로운 천체관은 계몽주의를 실제적으로 자극했다.
계몽주의자들의 유리주의(唯理主義)는 계시종교인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교회에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한 위기였다. 선천적이고 따라서 특별한 계시는 소용이 없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라는 「자연종교」의 체계는 존 로크 등에 의해 「이신론(理神論)」의 철학으로 완성돼 그리스도교에 대항했다.
최고 존재에 대한 지식, 영생의 희망, 상선벌악에 대한 신앙 등이 참된 종교의 본질적 핵심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역시 이 핵심으로 축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향들은 프랑스에서는 반교회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것들이 풍자되고 조소받았으며 일부는 『치욕적인 것을 분쇄하라』는 구호와 함께 투쟁을 선포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계몽주의는 결코 교회 안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하지만 계몽주의와 교회는 그러한 긴장과 적대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교회는 계몽주의와 대결하면서 자신을 좀더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계몽주의는 계시종교와의 대결에서 참된 계몽이란 이성이 전통이나 권위, 계시종교 등 다른 것을 계몽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계몽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몽사상이 주는 의미를 포착한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교회 개혁을 계몽사상에서 착수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다른 많은 가톨릭 계몽주의자들의 무분별하고 과격한 비판은 모든 운동을 불신하게 했고 교회의 발전에 해악이 됐다. 하지만 그것이 계몽사상이 던져준 과제와 정당한 요구를 무의미하게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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