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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83] 교황령의 소멸과 바티칸 시국

by 세포네 200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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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티칸 시국은 1929년 라테란 조약에 의해 세워졌다.

 

 

1천년 부침하다 도시국가로
프랑스혁명으로 교황령 침탈 시작
통일추구 이탈리아에 마침내 병합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이자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과 영적인 권한이 일치되어 행사되고 있는 유일한 장소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 테베레강 서쪽에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0.44㎢ 규모이다. 이 작은 나라는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에 맺어진 라테란 조약에 의해 세워졌다. 바티칸 시국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1천 여년에 걸친 교황령의 길고긴 부침의 역사가 깔려 있다.
교황의 세속적인 지배권이 미치는 영토였던 「교황령」(Papal states)은 8세기 중엽에 형성돼 1870년까지 근 천년 동안 지속됐다. 처음에는 교회가 이미 소유하고 있던 로마와 그 인근의 토지, 즉 이른바 베드로 세습령에 롬바르디아족이 점령했던 광대한 영지가 추가됨으로써 시작됐다.
교황령은 중세를 거쳐 오면서 북으로는 토스카나, 파르마와 모데나, 남으로는 캄파냐와 스폴레토까지 확대됐다. 교황의 아비뇽 체류(1305~ 1378)를 전후해 한때는 남부 프랑스의 일부 지역까지 확대되기도 했고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었다.
이후 17~18세기 교황령은 절대 군주제로 비교적 평안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상황은 달라졌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북쪽의 이탈리아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됐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교황령들이 희생됐다.
1798년 로마가 점령되고 나머지 교황령도 양도됐으며 비오 6세는 프랑스로 끌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상황은 또 다시 비오 7세(1800~ 1823) 때 변했다. 나폴레옹이 교황에게 감행한 폭력 행위는 오히려 교황의 도덕적 권위를 높여주었고 1815년 빈 회의에서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던 교황령이 수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령은 여전히 교황직의 수행에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곳곳에서 자유주의, 입헌주의, 민족주의적 운동을 불러왔고 교황령에서는 종래의 철저한 군주제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탈리아는 국가적 통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 등의 교황들은 이러한 움직임들을 박해,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자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적대감을 불러왔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처음에 자유주의적이고 애국적인 성향으로 간주됐었다. 1848년 3월 14일 교황령에서 헌법을 제정해 백성들이 어느 정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을 때 대대적인 환호와 열광을 받았다. 하지만 교황령의 초대 수상이라고 할 수 있는 펠레그리노 롯시 백작이 1848년 11월 민의원 의회 개회식에서 과격파 혁명가들에 의해 살해됐고 교황은 가에타로 피신하는 동시에 로마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비오 9세 교황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 끝에 태도를 바꾸고 구체제로 돌아가게 된다.
교황은 프랑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로마와 교황령을 탈환했고 종전의 전제군주 체제를 회복했다. 이러한 처사는 반대자들을 더욱 자극했고 빅토리오 엠마누엘 2세(1849~1878)를 정점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민족적 통합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눈사태로 커져버렸다. 1859년 로마냐가 교황령에서 떨어져나갔다. 교황의 군대는 카스텔피다르도에서 패전한 뒤(1860년 9월 18일) 우므리아와 마르케스도 내어주어야 했다. 엠마누엘 2세는 1861년 3월 피렌체에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아직 로마는 프랑스군의 점령으로 이들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가리발디의 침입은 1862년과 1867년 프랑스의 지원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7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하면서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군대를 로마에서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이 로마의 주둔지에서 철수하자마자 이탈리아의 통일운동 세력들은 즉시 로마로 진군했고 결국 1870년 9월 20일 로마는 이들에게 점령됐으며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됐다.
이로써 천년 동안 이어지던 교황령은 마침내 종말을 맞게 됐다.
교황 비오 9세는 바티칸으로 물러났다. 1871년 6월 빅토리오 엠마누엘은 로마에 거처를 정했고 교황의 항의와 파문은 무시됐다.
새 정부는 1871년 5월 13일자 소위 「보정법」을 통해 교황에게 연금을 보상으로 지급하고 일신상의 불가침성 및 주권의 인정과 더불어 모든 영적 기능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러한 모든 제의를 일축하고 계속 항의하며 「바티칸의 포로」로 머물렀다. 그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교령을 통해 정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과격파들에게 싸움터를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탈리아 정부는 점점 더 반교회적이 됐다.
결국 이 「로마 문제」의 해결책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야 논의되기 시작했고 오랜 협상 끝에 마침내 1929년 2월 11일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간에 라테란 조약이 맺어졌다. 교황은 이로써 종래의 교황령을 포기했고 바티칸 시국이라는 상징적인 도시 국가의 설립과 더불어 교황의 세속 주권이 인정됨으로써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됐다.
교황령의 보유는 교황이 자신의 영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대체로 부정적이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교황령의 상실은 도리어 교황의 위신을 향상시키고 가톨릭 세계의 일치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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