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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87] 제1차 세계대전과 교회

by 세포네 200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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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대전은 3700만명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평화 중재.후유증 최소화 노력
바티칸에 포로-가족 상봉사무소 설치
전례쇄신.성서보급.평신도 운동 시작

20세기에 접어든 세계는 이전까지의 역사상 어느 전쟁보다도 참혹한 대규모의 전쟁을 겪게 된다. 무려 3700만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을 겪으면서 인류는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인간 이성에 대한 불신을 가슴 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다.


1914년부터 4년간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가톨릭교회는 나름대로 국제 평화를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체험이 교회 안팎에서 놀라운 변혁의 동기가 된 것은 그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발발한 당시의 교황은 베네딕도 15세(1914~1922)였다.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한데 이어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28일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이 시작된 후 한달 반 가량 지난 9월 6일 새 교황의 착좌식이 거행됐다. 이탈리아 출신의 자코모 델라 키에사 추기경은 서임된지 불과 석달도 채 안된 8월 20일 전임 교황 비오 10세가 서거함에 따라 열린 교황 선거에서 신임 교황으로 선출됐다.


전쟁의 와중에서 아주 검소하게 착좌식을 가진 베네딕도 15세는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폐허와 혼란 속에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엄격한 중립 정책을 추구하면서 각 교전국에 평화 협정 체결을 요청했다.


교황은 『전쟁은 아무 쓸데 없는 대학살』이라고 정의하면서 공명정대하게 민족과 나라들간의 증오와 폭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1917년 8월 1일 교황은 공정한 평화 협정을 위해 교전국들에게 미리 준비한 장문의 평화 협정안을 제안했다.


이 협정안의 조항에는

△무력에 의하지 않는, 권리에 의한 평화 수립

△군비 축소

△강제력에 의한 분쟁 조정 방지

△해양의 자유 △배상금 제도 철폐

△점령 지역 회복 △영토권에 대한 우호적인 검토 등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제의는 철저하게 무시됐다. 교전 당사자들은 정중하게 교황의 제안을 검토했지만 본래부터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전혀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만이 상세하게 답을 보내 왔을 뿐이었다.


전쟁과 함께 재위를 시작한 베네딕도 15세 교황은 지치지 않는 정열로 세계평화의 중재자로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지만 결국 평화를 위한 제안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결코 굴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평화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전쟁의 비극이 비인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은 종전 후 포로와 그 가족들의 상봉을 위한 국제 사무소를 바티칸에 설치했고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과 행방 불명된 군인들을 찾는 일, 부상병과 포로들의 송환, 망명자와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 전쟁의 고통과 후유증을 완화시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유럽이 승자와 패자로 갈려 전쟁의 비극이 계속되는 일이 없도록 우려하고 경고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 교회에는 넓고 깊은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전임 교황들이 교권을 수호하고 교회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데다가 특히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류는 낡은 구속을 폐기하고 새로운 시작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교회 안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지난날의 과오를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19세기는 가톨릭교회가 많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주의적 교회, 종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오만함이 교회를 향해 계속적인 공격을 했다. 그것은 독일의 문화투쟁, 교황직 및 교황령에 대한 투쟁을 겸한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19세기 전환기에 있었던 프랑스의 반교회적 투쟁 등 때로는 존립마저 위협할 정도로 교회는 수세에 몰렸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세계로부터의 격리였으며 이는 학문, 문화, 정치 등에 있어서 세상과 공동의 작업을 어렵게 했다. 결국 교회는 근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에 함께 참여하는 기회를 놓쳤다.


구체적으로 19세기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적 노력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무시됐었다. 프랑스에서 교회의 공화제에 대한 거부는 19세기 말 반교회 투쟁을 낳게 했고 독일에서는 1차 대전 이후까지도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민주주의적 이해가 결여됐었다.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교회는 제때에 그 특성이 이해되지 못했었다. 교회가 뚜렷한 사회정책적 개념을 갖고 거기에 이웃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노동자들은 교회를 떠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로 향했고 레오 13세 교황의 사회 회칙은 너무 늦게 나왔다. 교회가 자신의 유산층을 고집하고 있는 동안 노동자를 포함한 무산계급은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로 넘어갔다.
교회 안에서 자각되고 있던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인식은 전쟁의 체험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교회 변혁과 쇄신의 원동력이 됐다.


19세기부터 국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쇄신 노력들은 20세기 초반에 접어들어 본격화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례쇄신운동과 성서보급운동, 그리고 평신도 운동들이며 이러한 움직임들은 마침내 교회 역사상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쇄신운동 중의 하나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 쇄신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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