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82] 나폴레옹과 교회

by 세포네 2005. 11. 12.
728x90

<=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과 교황 비오 7세가 만나고 있다. 나폴레옹은 로마와 교황청을 점령하고 교황을 감금했으며, 교황령을 프랑스 제국에 합병시켰다. 이에 교황은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교서를 작성했다.

 

 

파문 빌미로 교황 납치 감금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일어난 프랑스 교회의 박해는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1799년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함으로써 비로소 막을 내렸다.


1799년부터 1814년까지의 유럽사는 프랑스의 역사였다. 그리고 유럽의 중심 국가였던 프랑스를 나폴레옹이 장악한 이 시기는 「나폴레옹 시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나폴레옹과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중심이었다.


나폴레옹은 종교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단지 하나의 정치적 요소로 간주됐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교황 비오 7세였다. 1742년 이탈리아 체세나에서 태어난 비오 7세는 전임 교황 비오 6세가 1799년 8월 프랑스에서 사망한 뒤 그해말부터 오스트리아의 보호 아래 베니스에서 무려 14주 동안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됐다. 그때가 1800년 3월 14일이다.


58세에 교황이 된 비오 7세는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교회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회칙 「디우 사티스」(Diu Satis)를 그해 5월 15일 반포했다. 이어 그는 7월 3일 여전히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점령된 상태인 로마로 가 교황좌에 착좌했다.


교황 비오 7세는 전쟁으로 와해된 교황청을 내부적으로 복원하는 일을 추진하는 한편 프랑스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나폴레옹과 협상을 시도한다. 나폴레옹 역시 자신의 통치를 지지받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의 협력 뿐만 아니라 종교를 이용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1800년 6월부터 시작된 협상은 13개월의 오랜 시간을 거쳐 이듬해 7월 15일 프랑스와의 정교 조약 체결로 이어진다.


프랑스 혁명의 산물로, 프랑스 교회를 로마와 분리시키고 주교를 개신교와 유다교까지 포함된 선거 단체에서 뽑아야 했던 「성직자 공민헌장」은 교황청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국가주의적 교회 정책의 유지와 함께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이 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조약을 통해 교회 전례의 자유롭고 공적인 시행이 보장됐으며 교황청의 관할권도 인정됐다. 조약의 전문에서는 가톨릭적, 사도적, 로마적 종교인 가톨릭이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신앙임을 확인했다. 교회는 혁명 정부에 의해 몰수, 매각된 모든 교회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국가는 모든 본당 신부의 봉급을 지급하기로 했으며 프랑스 내의 각 교구들을 조정해 새롭게 설립하기로 했다.


비오 7세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조약의 체결을 비준했고 교서를 발표해 종교적 평화를 위해 주교들이 사임할 것을 촉구, 135명의 주교들이 사임했으며 프랑스 정부의 주교 임명권을 인정했다.
하지만 1802년, 프랑스는 교황이 정부 허락 없이 프랑스에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 77개의 「기초 조항」을 정교 조약에 첨부했다. 이는 조약의 일부를 다시 취소하는 셈이었다. 일방적으로 이뤄진 이 처사에 대해 비오 7세는 강력히 항의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비오 7세는 이후 줄곧 나폴레옹으로부터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1804년 나폴레옹은 자신을 프랑스 황제로 선출하게 한다. 교황이 나폴레옹을 도유(塗油)했고 대관은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했다.


비오 7세 교황은 이때에도 기초 조항들을 수정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교황과 나폴레옹의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1805년 나폴레옹은 다시금 이탈리아의 왕으로 밀라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려 했으며 교황은 전 유럽 교회를 프랑스 제국에 예속시키려는 나폴레옹의 종교 정책을 우려하게 된다. 이러한 염려는 마침내 나폴레옹이 이혼법을 포함한 시민법을 이탈리아 왕국에 도입하고 교황령인 안코나를 점령함으로써 가시화됐다.


1808년 1월 로마와 교황청을 점령하고 교황을 감금한 나폴레옹은 3월에는 교황청 군대를 나폴레옹 군대에 병합하고 이듬해에는 교황령을 프랑스 제국에 합병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교황 비오 7세는 1809년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교서를 작성했는데 미완성인 채 유럽과 프랑스에 유포된 이 교서를 빌미로 나폴레옹은 교황을 납치, 1812년까지 3년 동안 감금했다. 교황은 1812년 6월 파리 근처의 퐁텐블로로 이송됐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함에 따라 그의 지배는 무너지게 됐다. 여기에 1814년 3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1814년 1월 퐁텐블로를 떠나 사보나로 돌아간 교황은 1815년 6월 7일 대대적인 환호를 받으며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빈 회의(1814~1815)를 통해 거의 모든 교황령이 복구됐으며 유럽의 질서가 다시금 정리됐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