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천지역 최초 치명자 심락천, 윤용배
부천·시흥 지역은 지역의 발전과 더불어 교세도 점차 확장되고 있다. 이같은 결과에는 현재 신자들의 노력에도 물론 그 공이 있겠지만, 박해시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해준 조상들의 몫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부천지역 최초의 치명자라고 전해지는 심락천과 윤용배가 그들이다.
병오박해 즈음 서울에 살던 심락천의 아버지가 치명을 당하자 심락천은 가족과 함께 함박리(조선시대엔 인천부에 소속, 1914년 부천군이 됨)로 내려와 옹기를 굽고 생활하였다. 그 속에서도 심락천은 밤이면 가족들을 모아놓고 몰래 기도를 하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박리에서 좀 떨어진 대골 방아다리 부근(현 경기도 시흥리 대야동)에 사는 윤용배에게 천주학의 교리가 전파되었는데 윤용배는 밤마다 함박리로 마실을 다니며 심락천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이런 조그마한 신앙의 기쁨도 잠시, 무려 8백여 명의 순교가 있었던 역사상 잊을 수 없는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병인년 10월, 함박리 마을에도 밤을 이용하여 포졸들이 들이 닥쳤다. 심락천의 가족들은 그날도 하루 일을 마치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결국 심락천은 포졸에게 잡혀 나무에 매달려 매를 맞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대골 방아다리 마을에도 윤용배를 잡으려고 포졸들이 혈안이 되어 순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윤용배는 집과 조금 떨어져 있는 갈대숲에 몸을 숨겨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11월, 아들이 첫돌 되는 날(장남 윤선기) 아들을 보려 몰래 집에 왔다가 그의 부인과 함께 포졸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 후 어디로 끌려갔는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설에 의하면 경기도 광주로 끌려가 치명을 당했다고 하고, 치명일기엔 ‘등산 밑 윤서방 치명’이라는 기록이 보이나 문헌상으로는 정확하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하고 있다.
윤용배의 부인도 함께 잡혔는데 남편과 마찬가지로 끝끝내 신앙을 지키다 남편과 함께 치명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이들은 부천지역의 최초의 치명자요 순교자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윤용배의 치명 장소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윤용배의 4대 손(윤선기의 손자 및 손녀)을 만나 확인한 결과 윤용배와 부인 이씨는 부천 방아다리에서 치명하였으며, 아들 윤선기가 성장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후 동네사람들이 묻어 둔 부모님의 시신을 선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윤용배와 부인 이씨의 묘는 대야동 산 61번지 선산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 부천지역의 치명자 기록을 보면 박사앙, 심원경, 심봉학, 박도섭, 조도사, 정씨, 이돈호, 이이호가 있다.
<정리: 홍보실, 참고자료:소사성당 반세기>
사진설명; 좌측 위부터 아래 방향으로
1. 약현(중림동)성당 90년사에 나온 부천지역 치명자 명단. 박사앙, 심원경, 심봉학, 박도섭...등의 이름이 보인다.
2.. 옛 신자들이 이 흙다리를 건너 소사성당에 다녔다.
3. 윤용배 집 터
4. 윤용배 가족(중앙이 윤선기, 뒤 좌측이 차남 윤철영)
'[가톨릭과 교리] > 다시보는인천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0) | 2007.02.17 |
---|---|
성교감략, 천주교 요리문답 (0) | 2007.02.17 |
도화동 성당 장 베르뇌 주교와 무명 순교자의 유해 (0) | 2007.02.17 |
2. 이승훈 베드로, 황사영 알렉시오 (0) | 2007.02.17 |
1.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복음의 전례부터 박해 시대의 인천 (0) | 2007.0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