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갑곶성지에 가면 ‘신앙의 증거자’라고 적혀있는 박순집 베드로의 묘를 만날 수 있다. 박순집의 삶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웠다는데 의미가 깊다. 또한 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하여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전교활동에 힘쓰며 인천교구와 인연을 맺었다.
박순집이 증언자의 삶을 살게 된 연유는 그의 아버지의 삶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해박해 때 박순집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고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훗날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으면 잘 가르쳐줘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박순집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신부들과 평신도 등이 새남터에서 몇 차례 순교하는 것을 군인으로 참여하여 목격하게 되었다. 이에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와서로 이장하였다. 또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 시신도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전장운(요한), 정의배(마르코)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그후 병인박해가 심해지자 박순집의 일가도 결국 검거망에 걸려들어 1866년부터 2년 동안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번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해 위기를 모면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되자 박순집은 주교와 신부들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고,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있는 곳 등을 증언하였다.
이러한 증언을 엮어 153명 순교자의 행적이 밝혀진 「박순집 증언록」이 총 3권으로 만들어졌고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의 유해, 노고산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안치되었다. 그 후 가족과 함께 인천 제물포로 내려와 답동본당(초대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교에 힘썼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고, 인천에서의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인천교구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쟁이)에 묻혔다가 1961년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2001년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같은 해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로 천묘하였다.
신자들은 “피의 순교만 순교가 아니다. 박순집 베드로는 ‘땀의 순교자’다”라고 칭하며 증언자로서의 그의 삶을 높이 사고 있다. 실제로 그가 아니었다면 많은 순교 성인들이 이름없는 순교자가 되었을 것이며, 외국인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은 영영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니 ‘땀의 순교자’라고 불리우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사진 왼쪽) 2001년 5월 절두산에서 도화동성당으로 유해를 옮기는 중
사진 오른쪽) 갑곶성지에 있는 박순집 베드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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