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비밀리에 신앙을 꽃피운 대골 공소
윤선기(윤용배의 아들. 1/28 주보 참조)가 18세 되던 해, 고향이 그리워 부인과 함께 고향 대골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선기는 자기가 왜 천주학쟁이의 후손이 되었으며 아버지는 왜 포졸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된 윤선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신자가 될 것을 굳게 마음먹었다. 그때 이미 대골에는 박해를 피해 한 교우집(시흥시 대야동 326번지)에 비밀리에 공소를 설치, 정춘화라는 교우가 회장이 되어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춘화는 원래 충청도 서산에 살던 사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가족들이 모두 천주교신자라고 하여 순교했다. 15살 되던 해 대골로 와 생활터전을 마련한 정춘화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천주교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마음먹고 비밀리에 교우집에 공소를 설치하고 교리를 가르쳤다. 얼마 전까지의 박해로 인해 천주교리를 전파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꿋꿋이 동네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파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때 윤선기도 정춘화에게 감화되어 그길로 부인과 함께 공소로 찾아가 교리를 배웠다. 교리를 배운지 약 2년여, 윤선기는 방지거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음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정춘화의 나이 31살, 그는 15년여 동안 봉사해오던 공소회장직을 고향 사람인 윤선기에게 물려주었다.
대골공소 2대 회장이 된 윤선기는 그때 나이 20세로 천주교 신자가 된지 2년여 밖에 안되었지만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윤선기가 회장이 된 후 있었던 많은 사건 중 1886년 한·불 수호조약은 어둠속에 쌓였던 조선땅에 신앙의 빛이 살아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상복을 입거나 밤에만 몰래 활동하던 신자들과 신부들은 대낮에도 당당하게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윤선기는 서울 약현동(지금의 중림동)에 천주교 교리소가 설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그곳까지 찾아가 정확하고 올바른 교리지식을 배워 대골 공소 신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1889년 인천 답동성당(당시에는 제물포 성당)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대골 공소에 일 년에 한 번 만이라도 신부님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 1904년 답동 성당 제5대 주임 전학준 으제니오 신부가 처음으로 대골 공소에 머무르며 공소예절을 주례했다. 난생 처음 신부를 맞이한 대골 공소 신자들과 마을에는 일대 경사가 났었다고 한다. (좌측 사진이 전 으제니오 신부)
이렇게 찾아온 신앙의 자유와 함께 윤선기 회장의 희생 봉사정신에 감화되어 대골 마을엔 하나 둘 전통적 유교의 가치관을 깨고 천주교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1908년 공소신자가 무려 90명에 이르러, 1908년 인근 동네 새말 공소로(현 시흥시 신천동), 1938년 소사 공소로 살림을 내 주었다. (아래 사진)
이렇게 대골공소는 박해시대 때부터 일찍 시작되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렸으나 교회사 기록에는 이보다 훨씬 늦은 190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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