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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좌성당] 청주교구 내덕동성당 ◀ 1. 60년대 청주교구 성당 건축의 모델이 된 내덕동주교좌성당 전경. 메리놀외방전교회풍의 건물로 라틴십자형의 평면에 사각형의 종탑이 인상적이다. 왼쪽엔 구 사제관인 사도회관이, 오른쪽엔 유치원이 자리하고 있다. 2.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옛 제대와 새 제대가 함께 병존하고 있는 청주교구 내덕동주교좌성당 성전 내부. 제대 왼쪽에는 성모상이, 오른쪽 성가대석에는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라틴십자형 평면, 사각형 종탑 인상적 2007년으로 본당 설립 50주년. 짧지도 길지도 않는 신앙의 전통. 하지만 45년 남짓한 세월동안 교구 신자들의 정신적 주춧돌이 돼온 성당이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성당이다. 언덕길을 올라가려니 고풍스러운 성당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내덕동 주교좌성당과 부속건물인 사도회관.. 2005. 6. 2.
[주교좌성당] 국군중앙성당 ◀ 노을이 잔잔하게 비껴드는 해거름의 군종교구 국군중앙주교좌성당. 시온의 별을 상징하는 별 모양의 평면 지붕에 박해를 의미하는 로마 군인의 투구 형태로 꼭지점을 만들고 그 위에 예수성심상을 배치, 군 복음화의 의지를 담고 있다. ‘60만 군 복음화, 꿈★은 이루어진다.’ 건축은 시대정신과 풍토, 공동체의 기질 등이 깃들기 마련. 별(★) 모양으로 지어진 군종교구 국군중앙주교좌성당은 ‘시온의 별’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거기에 모든 군인의 꿈 ‘장성(스타)’이라는 의미가 중첩으로 내재돼 군종교구 주교좌본당으로서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군 선교’의 꿈이 함축된 서울 용산동3가 국군중앙성당은 그만큼 ‘군(軍)’이라는 공동체정신이 짙게 반영돼 있는 셈. 국군중앙성당이 군종교구의 주교좌본당이 된 것은.. 2005. 6. 2.
[주교좌성당] 전주 중앙성당 ◀ 1. 전주 중앙성당 입구 전면의 중앙과 좌우 양편에는 예수성심상과 성 베네딕도 상,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 상이 서 있다. 2. 전주 중앙성당은 신자들이 전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성당 내부가 화려하지 않게 꾸며져 있다. 3. 성 김대건 신부 등 순교 성인들의 유해가 중앙성당 신자들이 직접 쓴 신구약 성서 필사본 위에 현시돼 있다. 성당은 그 자체로 가톨릭 교회의 표징일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가 지향하는 모든 활동의 원천인 전례를 거행하는 거룩한 장소이다. 그래서 로마「미사경본 총지침」은 “성당 건축은 모든 거룩한 백성의 일치가 드러나도록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전례 공간의 일치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성당이 바로 전주교구 주교좌 중앙성당이다. 전주시 서노송동 639-.. 2005. 6. 2.
[주교좌성당] 대전 대흥동성당 ◀ 1.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모으고 있는 형상의 대흥동성당 전경. 62년 완공 당시 대전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화제거리가 됐던 대흥동성당은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대흥동성당 정면 현관 위를 장식한 12사도상. 왼쪽 6사도는 고 이남규 교수가, 오른쪽 6사도는 최종태 교수가 조각했다. 3. 성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14처 부조와 베네딕도회 수사가 14처 부조를 중심으로 벽에 그린 그림. 4. 1964년 한국천주교 전래 180주년 기념으로 이남규 교수가 제작한 성모상. 하늘 향해 두손 모은 '기도의 집', 1962년 대전서 가장 높은 건물로 완공 대전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인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은 시내 중심지에 위치해 시민들에게도 친숙하다. 신도시의 발전으로 .. 2005. 6. 2.
[주교좌성당] 제주 중앙성당 ◀ 1. 제주시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제주교구 중앙 주교좌성당의 우뚝 솟은 종탑이 제주 선교 100여년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듯하다. 2. 중앙성당은 주교좌 성당답게 1700석의 여유로운 좌석과 높은 천장, 양측 벽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늑함을 더해주고 있다. 제주시 삼도2동 도심 한가운데 빌딩들 사이로 높이 솟은 십자가탑이 눈길을 끄는 제주 중앙 주교좌 성당.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종탑은 전국 14개 교구 가운데 유일하게 개신교보다 가톨릭 신자가 더 많다는 제주도의 가톨릭 신앙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성당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80년 된 느티나무 가지가 만들어 내는 넉넉한 그늘과 그늘 아래 벤치가 찾는 이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게다가 성당을 지으면서 ‘열린 교회’를 지향해 주변의 모든 울.. 2005. 6. 2.
[주교좌성당] 안동 목성동본당 ◀1. 지난 7월 신축을 위해 성당을 허물기 전 목성동 주교좌 성당의 전경 (위) 2. 신축 중인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조감도. (아래) 안동 지역 최초의 본당인 ‘안동본당’으로 출발, 현재 안동교구의 주교좌 본당이 된 ‘목성동성당’(경북 안동시 목성동 산 1번지 소재). 지난 1927년 본당으로 설립돼 75년의 세월을 안동 지역민과 함께 한 성당이다. 하지만 여느 성당과 달리 목성동성당은 큰 아픔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두 차례의 화재로 성당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안동지역에 신앙이 전파된 것은 지난 1800년대 초. 신해박해(1791년)와 신유박해(1801년)를 피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신자들이 경상도 일대로 몰려 들면서부터다. 하지만 1815년 을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가 잇달아 경상도.. 2005. 6. 2.
[주교좌성당] 춘천 죽림동성당 예술미 빼어난 가톨릭 미술의 '보고' ‘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에는 차이가 있다. 예쁜 것은 화려하지만 은은한 향기가 없고, 눈에 스치는 그 순간뿐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넉넉함과 부드러움이 묻어나고 잔상(殘像)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춘천시내 약사리 고개에 자리잡은 죽림동 주교좌성당은 그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성당이다.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도 성당 구내를 한바퀴 돌아보면 “참 아름답다”는 탄성을 몇 번은 지를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손길이 닿은 작품일까…. 죽림동성당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1998년 9월에 현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교구장 장익 주교와 한국 가톨릭 미술계의 내로라 하는 예술가 20여명이 문부터 시작해 종탑·성물·유리화·제대까지 구석구석에 예술적 혼을 불어넣었다. 이.. 2005. 6. 2.
[주교좌성당] 원주교구 원동성당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신앙의 주춧돌' 강원도 원주시 원동 언덕에 자리잡은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園洞)성당. 언뜻 보면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성당일 뿐이지만 지난 100여년간 강원도 지역 선교의 요람으로, 특히 70년대는 반독재 투쟁의 불씨를 지피며 민주화 운동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원동성당이 한국 교회사에 써온 이력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원동성당은 규모가 아닌 내실로 따지자면 어느 교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원주교구와 닮은 꼴이다. 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이 주교좌본당으로 지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원동주교좌본당은 1888년에 설립된 강원도 최초의 본당인 풍수원본당과 부엉골본당에 이어 1896년에 설립된 세번째 본당이다. 그러나 1896년 부엉골본당.. 2005. 6. 2.
[주교좌성당] 대구교구 계산동성당 116년을 이어온 달구벌 신앙의 '요람'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위치한 대구대교구의 주교좌 계산동성당. 지난 1886년 대구 경북 지역의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본당)으로 첫발을 내딛고 1911년 조선교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면서 주교좌 성당으로 승격된 계산동성당은 그간 달구벌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전신인 대구본당이 처음부터 계산동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자리잡은 곳은 183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경북 칠곡군의 신나무골. 1886년 당시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본당이 설립된 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로베르 신부(한국명 김보록, 재임 1886∼1919)가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은 대구 읍내에서는 선교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신나무골에 본당.. 2005. 6. 2.
[주교좌성당] 인천교구 답동성당 상항도 제물포에 우뚝 선 '신앙의 요람' 1883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할 당시 인구 100여명에 불과했던 작은 어촌 제물포(인천의 옛 지명)가 지금의 거대한 도시 인천으로 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인천의 한복판 중구 답동 언덕에 우뚝 솟은 인천교구 답동(畓洞)주교좌 성당. 인천 앞바다를 고즈넉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답동성당은 인천 시민들과 온갖 풍상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해온 인천의 산 증인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재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2005. 6. 2.
[주교좌성당] 서울교구 명동성당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심장 주교좌(主敎座)의 협소한 의미는 ‘주교가 앉아 교회의식을 행하는 의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가 발전하고, 또 세상 한가운데로 나오면서 주교좌성당은 지역교구의 역사와 문화를 응축한 곳이요, 지역사회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터전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구의 주교좌성당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주교좌성당을 설립연대 순으로 주교좌성당의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건축사, 문화예술적 가치 등에 이르기까지 주교좌성당의 모든 것을 2002년 5월 19일부터 평화신문에 연재 했던 내용을 하나하나 올려봅니다. ‘한국교회 1번지’ 명동대성당.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었지만 10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 자체가 우리들에.. 2005. 6. 2.
[11] 아브라함의 독백 나의 이름은 아브라함.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다. 내 고향은 갈대아 우르. 문화가 발달하고 물질이 풍요한 곳이었지. 오늘날 파리나 뉴욕에 견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지시하신 새로운 땅으로 떠나라는 것이었어. 온 땅과 부모와 친구를 떠나라는 것, 그것은 나에겐 마치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솔직히 두렵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어. 나는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거든. 그런데 하느님의 부르심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었어. 나는 수없이 ?왜? 하필 저입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러나 결국 하느님의 말씀만을 철썩 같이 믿고 시키는 대로 고향을 떠났지. 다행히 아들과 같은 조카 롯과 함께 떠나니 마음에 큰 위로가 되.. 2005.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