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정원]/묵상글2707 능력과 사랑에 대한 증언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주님께서 매우 전전긍긍하시고 안달복달하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아버지에게서 보내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당신이 누구신지 그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주시고 알게 해주셔서 그것을 알게 된 너희 제자들도 당신을 증언할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거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제자들을 못 믿으시는 것이고, 제자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전전긍긍이고 안달복달입니까? 요한복음 15장은 그 유명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은 포도나무이시고 제자들과 우리 인간은 그 가지라는 것을 이 비유를 통.. 2020. 5. 18. 나도 성령의 허락을 받고 싶다.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늘 사도행전을 읽다가 비티니아로 가고자 했던 바오로가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셔서 가고자 하던 곳을 포기하고 트로아스로 방향을 돌렸다는 얘기가 새삼스러웠습니다. 성령의 허락을 받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고, 성령의 허락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읽고 보니 '그렇지, 성령의 허락을 받아야지! 그까짓 사람의 허락을 받거나 하물며 악령의 허락을 받아야지 되겠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든 생각은 '그런데 나는 어찌 이런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을까?' 또 '어떻게 해야지 성령의 허락과 반대를 알아채고 따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연달아 들었습니다. .. 2020. 5. 16. 삭정이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시며 우리는 당신의 가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그분 지체들로서 그분과 일치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교리 말입니다. 이 가르침이 맞다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분에게서 떨어지면 곧 죽게 된다는 것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래도 거부감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왜냐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요즘 추세인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품위를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깎으시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기죽이시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마음씨 좋은 사장이라면 자신의 밑에서 정비기술을 배운 사람이 이제.. 2020. 5. 13. 영적 집의 건축가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있는 돌로서 주님 집을 지으라고 하는데 그래서 오늘의 우리도 영적인 집을 짓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코처럼 주님의 집을 짓되 그 짓는 것이 이어야겠습니다. 만일 가지 않고 내 안에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집을 지을 수 없고, 안주하는 공동체도 결코 주님의 공동체, 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우린 개인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가야 하고 가야지 프란치스칸입니다. 그러나 가야 하지만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라는 오늘 베드로의 말처럼 먼저 주님께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 2020. 5. 10. 맞아들임에 대하여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맞아들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코로나 전염병의 홍역을 치룬 뒤여서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 후 아침을 먹으면서 본당사목을 하는 수녀님께 요즘 미사에 오시는 분들이 코로나 사태 전과 같은지, 아니면 줄었는지 물었더니 아직은 전보다 많이 나오시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아무튼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도 하고 반성도 하게 되는데 저는 길을 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잠재적인 전파자로 여겨지면서 가능한 한 마주치는 것을 피하게 되었는데 이런 저 자신을 보는 것이 한편 부끄러우면서 다른 한편 슬펐습니다. 사람을 기꺼이 맞아들이지 않고 꺼려하다니 .. 2020. 5. 7. 증언력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주님께 요구하자 주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 하는 데 실패를 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신자들은 평범한 신자인데도 주님을 믿게 하는 데 성공을 하고, 안티오키아에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데 어찌하여 평범한 신자들보다도 못할까요?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증언력이 떨어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얘기하면 자기 자랑한다고 생각하거.. 2020. 5. 5. 육은 진정 아무 쓸모가 없는가? 요한복음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말씀, 빛, 생명 이런 것들을 집요하게 얘기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빵에 대한 6장의 말씀을 내내 들었는데 그래서 6장은 빵이 주제인 것 같고 그렇게 얘기해도 무방하지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생명이 주제이며 생명을 주는 빵이 한 주제이고 오늘은 여기에 더해 생명을 주는 말씀이 또 다른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주는 빵이 있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인데 이 말을 뒤집으면 빵이라고 하여 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요, 말도 한 사람을 살리는 말도 있지만 고꾸라트리는 말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면 어떤 빵과 어떤 말이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까? 이에 대해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 2020. 5. 2. 교회적인 회개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교회적인 회개. 오늘 사도행전은 드디어 사도 바오로가 회개하는 대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개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회고하듯이 주님께서 시작하게 하신 회개이고 그런 만큼 아주 극적입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회개할 마음이 없었던 사람이고, 특히 예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꿈도 꾸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편지에서 얘기하듯 훌륭한 스승 밑에서 율법을 배웠고, 하느님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섬겼기에 자기에게 회개할 것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를 하느님의 적대자로 여겼기에 그리고 그 잔당.. 2020. 5. 1.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 안에서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느낌은 하느님의 거대한 섭리입니다. 각각의 것을 따로따로 보면 그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조각이나 일부가 마치 모자이크나 자수처럼 전체를 펼쳐놓고 보면 알 수 있듯이 각각의 사건도 하느님의 전체 섭리 안에서 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모자이크나 자수를 보면 전체적으로 봐야 그림이 나옵니다. 한 부분은 그저 한 점에 불과하고 그래서 의미가 없습니다. 한 부분만으로는 의미가 없는데 전체적으로는 의미가 있고, 실로 그 한 점, 한 점이 없으면 전체 그림도 없습니다. 또 이렇게 볼 수도 있.. 2020. 4. 29.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에 구애 받지 않는다.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는 강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 경구는 '어리석은 자는 작은 것도 크게, 현자는 큰 것도 작게'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표현이며 인생 철학이고 그저 철학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신앙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과 맥이 통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에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우리가 산 정상에 올라가 느끼는 것이 내가 그 힘든 산을 정복했다는 뿌듯함뿐이라면 그 영적인 수준은 낮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뿌듯함보다는 위에서 내 살던 곳을 내려다보며 내가 저곳에서 그렇게 지지고 볶고 살았음을 반성하고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초월 정신을 배울 때 그 수준이 높다 하겠지요. .. 2020. 4. 23. 이상적인 공동체는?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에 우리는 '그렇다면 보고 믿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입니까?'하고 반문케 됩니다. 진정, 보고 믿는 사람은 불행합니까? 주님을 뵐 수 있는 것이 불행입니까? 그렇지 않고 그러므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보지 않고 믿어야 행복하다는 뜻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어야 할 후대 사람들에게 격려를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2020. 4. 19. 오만을 깨고 사랑을 돌려드릴 때 부활 아침에 . . . 부활 축하드립니다~~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 . . 니체라는 철학자가 "신은 죽었다."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신이 자살하였다는 뜻이겠습니까? 신의 수명이 다해 자연사했다는 뜻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다 말이 되지 않지요. 우선 신이 죽었다는 말조차 말이 되지 않지요. 신이 죽는다면 그게 무슨 신입니까? 그리고 신이 자살을 한다면 신도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신이 죽었다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죽임당하신 것처럼.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떻게 타살된 것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인간의 무관심으로 인해서입니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한 것은 신이 살아있어도 상관없고 죽었어도 상관없는 우리에 의해 무의.. 2020. 4. 12. 이전 1 2 3 4 5 6 7 ··· 22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