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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세계교회100사건

[11] 사도시대의 교부들

by 세포네 2005. 6. 30.

100여명 밖에 들어 갈 수 없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언어의 장벽을 뚫고 전해져오는 같은 신앙고백에 '하나의 신앙 안에 한 형제' 임을 체험하며 몸서리 쳤다.
이처럼 우리 교회의 신앙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 그곳이 비록 아프리카 어떤 오지라 할지라도.
시간적으로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지도 어느듯 2000년. 그 긴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이 '하나의 신앙'으로 이어 내려오게 하는지. 그 힘은 무엇인지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은 언제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또는 '우리가 전해들은 바에 따라'였다.
주후 100년 경의 교회는 사도들의 수가 순교로 적어지자 그 제자들이나 아니면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교회를 지도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사도들의 공백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 박해의 위협까지 함께 받고 있어서 지도부의 권위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사도들 이후 교회를 맡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항상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혹은 전해들은 바에 따라 자신들이 감독하던 지역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처해 나갔다.
이러한 가르침의 계승을 전승이라하고 이것을 신앙의 규칙(regula fidei)이라고 불렀다.
사도교부란
오늘날 이처럼 사도들로부터 전해받은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 즉 사도적 전승을 이어받아 후대에 물려준 초세기 저술가들을 사도시대의 교부 혹은 사도교부라고 한다.
교부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으로 교회의 지도자급 인물 즉 주교들을 말하는데 쉽게는 공의회 문헌들을 결정하고 반포한 주교들을 가르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을 일컫는데 해당 교부가 저술시 사용한 언어에 따라 그리스교부와 라틴교부로 나뉜다.
사도교부란 교부들 중에서도 신약성서의 후기 경전들과 동시대인 1세기 말부터 2세기 중엽까지의 저술가들을 지칭한다.
사도들로부터 세워진 교회들이 뿌리를 내리는 이 시기의 교부들은 사도들과 그후 세대 사이에 올바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달해주는 교량 구실을 하며 성전(聖傳)의 기초를 놓았다.
만약 이 당시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자기 생각대로 신자들에게 가르쳤다면 아마 오늘날 전 세계 교회는 그 민족과 언어의 다양성 만큼이나 다양한 신앙의 형태를 띄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사목적이고 교훈적이었던 가르침
로마의 글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나의 뽈리카르푸스,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가 사도교부들에 속하고 저자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하지만 '바르나바의 서간', '헤르마스의 목자', '디오그에토에게 보낸 서간', '디다케' 등의 문헌도 사도교부 시대의 것으로 간주한다.
사도교부들은 사도들의 감소와 박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던 시기에 활동했다. 따라서 복음의 순수성과 가르침의 정통성을 보존하면서 이단을 바로잡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윤리에 맞는 생활을 강조하며 교회의 지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장상에 순명 할 것을 권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에 의해 사도교부들의 저서들은 사목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고 아직 체계적인 신학을 펼치지는 못했다.
사도교부 시대 최초의 문헌인 제4대 교황 글레멘스가 95년 경에 쓴 '제1고린토 서간'은 사도 바울로가 이미 꾸짖은 바 있는 고린토 교회의 내분이 재발해 일부 평신도들이 성직자를 추방하고 또다른 신자들은 성직자들을 옹호해 공동체가 파당싸움으로 붕괴될 지경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쓴 충고 편지이다.
사도시대부터 각 지역 책임자는 주교에 의해 관리돼 온 것이 관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린토교회의 분란에 멀리 떨어져 있는 로마의 주교가 간섭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갖는 로마주교의 우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의 수위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인정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같은 증언은 이냐시오가 순교하기 위해 로마로 끌려가면서 로마교회에 보낸 감사편지에서도 잘드러난다.
이냐시오는 또한 미르나 교회에 쓴 편지에서 "예수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교회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서 최초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톨릭교회로 표현했고 주교주교를 중심으로한 교계제도의 발달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이처럼 사도교부들의 저서는 우리가 원시 그리스도교 의 생활과 사상, 체계를 아는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원시 공동체의 규칙, 전례생활, 신약성서의 발전과정, 교회사 등과 관련한 소중한 자료들이다.
목숨으로 지킨 신앙의 원칙
이처럼 사도교부들은 정통가르침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생활 또한 거룩했으며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뽈리카르푸스는 155년경 화형으로 순교하는데 그이 순교록에 따르면 "총독이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 보내 주겠다고 하자 뽈리카르푸스는 '그분을 섬긴 지가 86년이나 됐는데 하느님이 제게 잘못한 점이 한가지도 없는데 어찌 저주 할 수 있겠소'"하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86세 백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던 성인처럼 사도시대 교부들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고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해 헌신했다.
그리고 그공로로 오늘날 전세계 가톨릭신자들은 모여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계시진리를 왜곡없이 알수 있게 됐고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한국교회도 교리지식이 부족하던 초기 성직자가 없음을 한탄하여 임의로 성직을 만들어 운용하다 잘못된 것임을 알고는 즉시 중지하고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눈물로 범벅이 된 통회의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오르는 것은 지킬 것은 지켜가야 한다는 생각이 깊어서였을까.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는 너무 자주, 다양한 이유로 신앙의 원칙이 무시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후손들에게 왜곡되지않은 신앙을 물려 줄 수 있을까, 과연 그 신앙의 원칙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을까 곱씹어 본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공동체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기 시작했고 흩어진 신자들은 이교도 지역에서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성교회가 창립돼 '그리스도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이라 불릴만큼 독립된 종교단체로 주목을 끌었다.
이에 사도들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견해 교회를 돌보게했고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머물던 바오로를 초빙하고 이때부터 사도 바오로의 위대한 전도여정이 시작된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그의 전도여행에 있고 그 전도여행의 위대함은 구원의 복음이 유태교나 팔레스티나지역의 좁은 곳을 벗어나 전 세상을 위한 보편적 복음이 되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데 있다.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세번에 걸쳐지중해 동부지역에 광범위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대도시였다.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셋째가는 큰 도시였고 동방과의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안티오키아의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바오로 사도가 왜 이곳을 전교의 거점으로 삼았는지 충분히 대변해 주고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화에 휩싸이는 계기가 되고 이로인해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남긴 유적은 물론 그리스도교 공동체 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은 이름마저도 안타키아로 바뀐 도시 뒷 언덕에 있는 베드로 석굴성당만이 남아 그나마 멀리서 달려온 순례자들 허탈한 마음을 달래준다.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함께 이곳 안티키아를 떠나 키프로스섬으로 가면서 첫번째 전도여행(45~49년경)을 떠나 베르게 비시디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데르베 등지에서 전교활동을 펼쳤는데 이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했다.
이방인들의 입교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에게 예수의 신앙만을 요구할 것인가 유대교 율법까지 지키도록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돼 결국 예루살렘에서 사도공의회(49년경)가 열리게 된다.
교회 역사상 첫 공식적인 회의인 이 사도회의에서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로 결의함으로써 바오로는 명실공히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앞으로의 그의 전도여행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첫번째 전도여행의 성공에 고무된 바오로는 곧이어 두번째 전도여행((50~52경)을 떠나는데 특히 고린토에서 18개월간 머물면서 신약성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데살로니카 전서를 집필했다. 두번째여행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바오로가 유럽에 첫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필립비교회가 바로 이 두번째 여행중에 바오로가 유럽(지금의 그리스)에 세운 필립비, 데살로니카 , 베레아, 고린토의 네 교회중 처음으로 세운 교회로 이후 필립비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전도와 생계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돕는 유일한 교회가 된다.
두번째 전도여행에서 가장 오래머물렀던 고린토에는 52년경 바오로 사도가 갈리오 총독에게 심문을 받은 법정 축대가 보존돼 있어 그 위대한 여행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세번째 전도여행(53~58년경)의 중심지는 3년가까이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던 에페소였다. 바오로 사도는 이 곳에서 많은 위험과 시련 속에서 고통을 당했고 얼마동안 옥고까지 치른 것으로 보여진다.
복음전파를 위해 스스로 감내한 사도의 그로한 수난은 신앙의 씨앗이 돼 에페소 교회는 당시 교회들 중 가장 큰 교회가 됐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앙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다.
지금도 에페소의 성요한 대성당 유적을 보면 당시 교회가 얼마나 활발했던지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전도여행지를 찾아 다니면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 전도여행의 성공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것이었고 이를 오늘날에는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빠르고 넓은 전파는 사도 바오로의 열정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지니고 있는 진리의 힘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있었던 희랍 사상아래서 고대인들이 가장 고민했던 신의 문제, 영혼의 불멸, 지상생활의 목적, 정의 등의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교 사상이 주는 명쾌한 해답은 이교적 세계관의 체험 속에서 진리를 찾던 이들에게 구원의 빛줄기가 됐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이교들과의 차이점, 즉 그리스도교의 윤리성, 초월적인 선험적 종교관 , 역사 속에 생동하는 역사성, 이를 증거하는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기적 등은 입교자들에게 참된 새로움을 주기 충분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바오로의 남다른 배경도 그의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한 요인이 됐다.
바오로는 첫째 율법을 가르치던 바리사이로서 개종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이 유다교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지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있었다. 둘째 바오로는 디아스포라 유다인으로 넓은 세상에 대한 많은 경험과 더불어 희랍어를 잘 구사했을 뿐 아니라 희랍 사상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바오로의 두가지 장점은 그의 전도여행을 성공으로 이끄는 훌륭한 바탕이 되는데 첫째가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대한 예언자가 되지 못했 것이고 둘째가 없이는 이교인을 위한 성공적인 선교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가 가졌던 첫번째의 성공요인인 그리스도교가 가진 진리의 힘은 이미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자로서의 사명인 복음선포를 위해서는 내가 믿는 신앙에 대한 이해와 복음대상에 대한 이해 그리고 복음을 위한 헌신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로 보인다.
"나의 기대와 희망은 내가 조금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렇듯이 지금도 온 세상에서 찬양 받는 것입니다"(필립 1, 20)

  200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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