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영성]2400 [23] 삼장서 논쟁과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성당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 개최됐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 1453년부터 500년간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다 1935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황제 단성론 옹호…교황과 관계 단절 ‘죽은 세 주교·저술 단죄’ 큰 반발 불러 성좌권위 떨어지고 동·서방 대립 심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현존하는 성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지은 것으로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532년 폭도들에 의해 불타버린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 5년 10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했다. 유스티아누스가 537년 축성식을 거행하기 위해 입장하다 감격해 "솔로몬대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완공 후 1000여년 동안은 .. 2005. 7. 6. [22] 강도회의와 칼체돈공의회 ◀= 칼체돈공의회가 열렸던 성녀 에우페미나 성당에는 하이다르파사 기차역이 세워져 수천 수만명의 이슬람 교도들이 메카와 메디나로 순례를 떠나는 시발역이 됐다. 독일의 벨테 신부는 "교의의 역할은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듣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교의는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를 근거로 삼아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말인즉 교리라는 것은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강조돼 주객이 전도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앙교의를 정립한 초대교회의 공의회들을 둘러보면서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로 인한 신앙해석으로 시작된 교의논쟁들이 심심찮게 올바른 예수이해를 위한 대화의 장이 되기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관철하기 위한 대결의 장이 되고 있음을 되새겨 보지 .. 2005. 7. 6. [21] 네스토리우스 이단과 에페소 공의회 에페소는 바울로 사도가 3차 전도여행시 27개월간이나 머물며 대대적으로 선교했고 사도시대 교회들 중 가장 규모가 컸었던 공동체였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에페소에는 사도 요한과 루가의 무덤, 성모님께서 말년을 보내셨다는 성모 마리아의 집, 성요한성당, 성모성당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있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모께 봉헌된 첫 번째 성당인 에페소의 성모성당은 성모님께서 요한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옮겨와 살던 곳으로 431년 제3차 보편 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가 열린 곳이다. 그리스도론 논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삼위일체론이 정리되고 난 후 교회의 최대 관심사를 표명한 것이다. 성자.. 2005. 7. 6. [50] 대건축가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하갈랴의 아들로 아르닥사싸 황제의 궁내에서 관리로 살고 있었다. 어느날 동생 하나니가 유다에서 돌아와 고향 소식을 전했다. “그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니?” “형님, 말도 마십시오. 포로생활 후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몹시 고생하며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채로 있고 성문들도 불에 탄 채 그대로 있습니다. 너무 흉물스러워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그 말을 듣고 느헤미야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슬피 울며 하느님께 단식하며 기도를 드렸다. “야훼 하느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한결같은 사랑으로 지켜 주시는 분이시여, 저의 기도에 귀 기울여주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설하도록 도와주소서.” 드디어 느헤미야.. 2005. 7. 6. [원주교구] 대화성당 ◀ 1. 아담한 양옥을 연상케 하는 대화성당은 소박하지만 성미술품으로 가득 찬 예술성당이다. 2. 성당 내부의 도벽은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녹색과 하늘색이 주를 이루는 유리화는 은은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3. 제대와 감실, 독서대는 같은 재질의 붉은 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에 공간 전체에 통일감을 준다. 4.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멀리서 보면 이쁘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도 코도 입도 없어서 별명이 '100m 미인'이다. 5. 찾아가는 길 성미술품으로 어우러진 '예술 성당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 2005. 7. 6. [20]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 제1차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된 성 이레네 성당. 십자가 형태의 이레네 성당은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성당으로 개조됐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친 도시이면서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비잔틴 시대에는 비잔티움으로 불렸던 역사적 도시로 1923년까지 1600여년 간 이 나라의 수도였으며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로마제국을 지배하던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통일하자 제국의 새로운 수도, 신 로마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귀족과 기득권 층의 끊임없는 음모와 술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지리적으로는 방대한 영토의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서쪽으로 치우친 로마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종교적으로도 제국 .. 2005. 7. 3. [19] 아리우스 이단과 제1차 니체아공의회 “니체아 신경 채택한 최초의 공의회” 재작년 수천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터키 대지진의 진앙지 '이즈니크' 호수변에 자리잡은 이즈니크는 주민 2만여명의 소읍에 불과하지만 로마·비잔틴 시대에는 꽤 이름난 도시 니체아였다. 로마시대에는 비타니아 속주의 주도였고 십자군 전쟁시에는 4차 십자군에 점령당한 비잔틴 제국의 임시 수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회사 안에서 니체아는 맨 첫번째 공의회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325년에 소집된 제1차 니체아공의회는 모든 공의회 중 최초의 공의회이면서 모든 교의논쟁이 발생할 때마다 니체아신경이 정통성의 기준이 될 정도로 가장 중요한 공의회였다. 니체아공의회는 부활대축일의 날짜를 춘분이후 만월 다음 주일로 확정하고 성직자 생활, 교회구조, 공적 참회, 전례문제 등.. 2005. 7. 3. [18] 밀라노 관용령과 제국교회 “타종교 포함 종교자유 허용” 이탈리아의 경제는 북부 지역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밀라노는 이탈리아 경제를 이끌고 있는 경제 수도이다. 또한 이탈리아 북서부의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인 밀라노는 경제 중심지일 뿐 아니라 역사적 건축물과 박물관, 대학 등으로 둘러싸인 전통의 도시다. 그 중에서도 밀라노의 두오모(주교좌) 대성당은 이탈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고딕건축 양식의 특징 중 하나는 뾰족탑이라 부르는 첨탑과 천정을 높게 하는 것인데 이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소망을 표현하면서 하느님께 사람들을 들어 올린다는 표현의 의미라고 한다. 두오모 광장에서 바라보는 대성당의 위용은 정말 하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할 만큼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밀라노에서도 모든 중심지는 이 두오모 .. 2005. 7. 3. [17]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전승 이끈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성주간이 되면 교황은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순교자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어 쓰러져간 콜로세움에서 십자가를 손수메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한다. 이 콜로세움에서 서쪽으로 1.5㎞ 정도를 가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나타난다. 후에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기도 한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막센시우스를 물리치고 서로마를 제패한 기념으로 원로원이 건조해 콘스탄티누스에게 헌정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쟁의 승리후 313년 밀라노에서 동로마의 황제 리치누스와 협정을 맺고 그리스도교의 종교자유를 허용했다. 순교지의 대명사 콜로세움과 순교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함께 바라보고 있노라면 남다른 신앙의 감동이 전해져 오는.. 2005. 7. 3. [16] 로마제국의 박해 300년 박해 순교신심으로 극복 처음 로마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놀라움과 반감이 아닐까 싶다. 4대성당을 비롯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교회 유적들의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은 이를 건축한 신앙인들의 놀라운 신앙열정을 체험케하면서도 왠지 이질감 내지는 노예문화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함께 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은 카타콤바를 순례하면서 사그라지게 될 것이다. 지상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는 참혹한 환경 속에서 살다 스러져간 지하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이라는 튼튼한 기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는 느낌, 아니 이들의 순교가 있었기에 지상교회의 영광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떼르뚤리아누스의 『순교자의 피는 .. 2005. 7. 3. [49] 신앙부흥을 주도한 학자 에즈라 에즈라는 바빌론에서 출생한 스라야의 아들이다. 에즈라는 제사장 계통의 인물이면서 야훼의 율법에 정통한 선비로서 사람들에게 '학자 에즈라'로 불렸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와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바빌론을 점령했다. 고레스왕은 칙령을 반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는 세상을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하시길 빈다. 너희들은 이제 자유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 그 후 페르시아를 아르닥사싸 황제가 통치할 때다. 황제는 선비 에즈.. 2005. 7. 3. [대전교구] 금사리성당 ◀ 1.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금사리 성당. 앞쪽 오른쪽이 옛 사제관이고, 그 뒤로 옛 성당과 1968년 건립한 새성당 건물이 보인다. 2. 외부 복원을 마친 금사리본당 옛성당 앞에서 김성헌 신부(왼쪽)와 마을 신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성당은 충남 부여군의 첫 고딕 건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다. 3. 성당 입구 성모상 앞에 놓여 있는 돌제대.'1913년 9월 2일 민 주교 축성'이라는 글씨가 한쪽에 써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옛 사제관. 4. 내부 복원 공사 중인 금사리 옛성당, 중앙 나무 기둥을 일렬로 세워 전례공간을 둘로 나눈 2랑식(廊食)이 다른 성당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5. 본당 유물관에 전시된 미사경본, 제구들. 1906년 완공한 충남 부여군 첫 고딕건물-충청.. 2005. 7. 3. 이전 1 ··· 183 184 185 186 187 188 189 ··· 20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