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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2400

[57] 야훼의 날을 선포한 요엘 예언자 요엘이란 이름은 '야훼는 하느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브두엘의 아들인 요엘이 활동하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자연 재해로 많은 백성들이 고초를 당하고 있었다. 큰 메뚜기떼가 기승을 부려 밭은 메마르고 곡식이 고갈되어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성전에서 드려야하는 제사의식까지도 못할 정도로 식량이 바닥났다. 이스라엘 지방은 본래 메뚜기가 많았다. 메뚜기는 식물을 먹고 사는데 자주 떼를 지어 농작물을 습격해서 먹을 것을 앗아갔다. 메뚜기는 이스라엘 지역의 농부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요엘 시대에도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나무와 풀이 죽어 가축들도 굶어 쓰러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적까지 쳐들어와 백성들은 큰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예언자 요엘은 이 모든 사건들은 결.. 2005. 8. 3.
[대전교구] 충남 합덕성당 ◀ 1. 지난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본당 신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본당 역사상 전신자 사진은 거의 처음으로, 본당 달력에 사용할 계획이다. 2. 성당 내부. 대전교구 첫 고딕식 성당인 공세리성당과 비슷하다. 3. 성당 뒷뜰에 있는 성직자 묘지. 내포지역 신앙.성소 못자리 115년 역사 자랑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향수에 젖어들어요." 누구나 고향 이름을 들으면 그리움이 앞서지만 대전교구 합덕본당 출신들이 '합덕'이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향수는 남다르다. 내포지역 신앙 못자리이자 성소 못자리라는 '믿음의 고향'에서 자란 때문이리라. 대전교구 모(母)본당인 합덕본당은 1890년 설립됐다. 양촌성당으로 출발했으나 9년 뒤 현 위치(충남 합덕읍 합덕리 275)로 옮기면서 합덕성당으로.. 2005. 8. 3.
[45] 십자군 운동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 성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최고의 성지인 이 곳은 일년 내내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무덤성전. 그러나 순례의 시각을 떠나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이곳은 생각만큼 그리 엄숙하고 평화스럽지 못한 곳이다. 성지의 소유권과 관할권을 둘러싸고 수많은 분쟁이 오고갔으며 지금도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 6개 종파가 하나의 성전을 갈기갈기 찢어 소유하고 있다. 신앙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상징해주는 듯하여 기분이 여간 씁쓸한 것이 아니다. 이 무덤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지탈환의 대의명분 속에 교회역사상 가장 큰 종교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2005. 8. 3.
[44] 동방 대이교 훔베르토 추기경이 파문교서를 놓은 성 소피아 대성당 내부. 사진 뒤편 가운데가 파문교서를 놓았던 중앙 제대 자리다. 1054년 동·서 교회 완전 결별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지어다』(Videat Deus et judicet) 성직서임권 논쟁으로 교회 개혁이 시작될 즈음 교회는 또 하나의 아픈 상처를 입었다. 그리스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동방교회와 라틴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서방교회가 1054년 완전히 결별하게 된 것이다. 위의 말은 양교회의 화해를 위해 레오 9세 교황의 특사로 파견된 훔베르트 추기경이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대성당 제대위에 콘스탄티노플의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 등의 파문교서를 올려놓고 난 후 외친 말이다. 나흘 후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도 교황사절을 파문함으로써 동서.. 2005. 8. 3.
[43] 보름스 정교조약 교회, 주교 선출 서임권 확보 독일 라인강을 끼고 있는 포도주 거래의 중심지 보름스는 독일내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이다. 부르군트 제국의 수도였으나 5세기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재건된 유서깊은 곳으로 하인리히 4세와 적발왕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2세 등이 결혼한 독일제국의 중심도시였다. 이곳에서 1122년 성직 서임권 논쟁의 결말을 짓는 보름스 정교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은 정치적으로나 교회 내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 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선종 이후 독일은 깊은 당파싸움에 빠져들어 수많은 내전에 휩싸였고 마침내 하인리히 4세는 1105년 자신의 친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축출된 후 아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다 1106년에 사망.. 2005. 8. 3.
성지로 떠나는 여름휴가 [펌] 와! 성지순례, 피정, 휴가를 한꺼번에...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건강하게... 작열하는 태양과 시원한 계곡, 추억이 출렁대는 바다…. 본격 여름휴가 시즌이다. 가족, 친구들과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교통체증이나 바가지 요금, 넘쳐나는 인파로 소중한 휴가를 망칠 수도 있다. 그래서 웰빙 피서로 성지순례와 피정, 휴가를 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알뜰하고 건강한 휴가는 피서지와 인근 성지, 본당, 피정의 집 정보를 꼼꼼하게 챙기고 숙소를 예약해야 가능하다. 올해는 특히 103위 시성 20주년인 만큼 103위 순교성인 관련 성지를 중심으로 테마 성지순례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국 권역별로 주요 성지와 피서지 부근 성당, 중요 관광지 등을 묶어 올여름 성지순례로 휴가계획을 짜봄직하다. ■ .. 2005. 8. 2.
[56] 사랑의 예언자 호세야 어느 날 야훼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 나라가 야훼를 저버리고 음란을 피우고 있구나.” 호세아는 야훼의 이 말씀을 듣고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 부인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남매를 두지만 후에 부정을 저지르고 가출하게 된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 그는 삶을 통해서 하느님은 음행한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이 다시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큰사랑을 예언한 것이다. 호세아는 인간적으로 쓰라린 고통, 특히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인생의 쓴맛을 보았던 사람이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빠져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가버렸을 때 겪게 되는 남편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이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 당시 .. 2005. 7. 27.
[서울교구] 방배동성당 ◀ 1. 성전 내부는 신혼 부부의 핑크빛 미래를 연상시킬 만큼 밝고 고운 색조를 띄고 있다. 2. 제대 한 가운데 있는 감실과 성체등. 3. 성당 바로 뒤편에 나 있는 산책길. 4. 프레스코화 십자가의 길 "서울에 이런 성당이..." 감탄사 절로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예쁘고 근사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은 게 혼인을 앞둔 선남선녀의 바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방배동성당(주임 임덕일 신부)은 서울대교구 200여개 성당 중에서 결혼식 명소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성당으로 꼽힌다.'서울 시내에 이런 성당이 다 있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성당이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내려 2번 출구 경남아파트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다가 성당 .. 2005. 7. 27.
[42] 그레고리오 개혁과 서임권 논쟁 이 성문 앞에서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게 자신의 주교 서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평신도의 성직 임명 금지 선포  1077년 1월 28일, 이탈리아 북부 카놋사의 성문 앞.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독일의 하인리히 4세 황제가 화려한 황제복 대신 참회복을 입고 3일째 맨발로 눈밭에 서있었다. 성직자 서임과 관련해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며 파문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놋사의 굴욕'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 사건은 11~12세기 성직 서임권을 둘러싼 교황권과 세속권력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황제들과 제후들이 자신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임명하는 이른바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은 2중의 큰.. 2005. 7. 27.
[41]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프랑스 동부에 있었던 클뤼니 수도원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위그노 및 프랑스 혁명 폭도들에 의해 거의 파괴되고 현재는 일부 벽과 기둥, 주춧돌만 남아있다.    폐단에 맞서 엄격한 수덕생활 영주제로 재편되는 중세 사회의 복잡한 발전과정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걸쳐 왕이나 세력가들은 자신의 세력유지 수단으로 성직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그 대가로 봉토를 사여 했다. 또한 당시 교육과 학문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으며 귀족 출신들이 성직에 대거 참여했다. 이처럼 높은 출신 성분과 교육 수준, 막대한 부를 지닌 고위 성직자들은 일찍부터 국가로부터 정치적 특권을 얻었다. 세금이 면제됐고, 치외법권이 허용됐으며 재판권까지 행사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시장.. 2005. 7. 27.
[40] 오토 1세와 신성로마제국 아헨대성당 내에 있는 오토 3세의 무덤.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상앞에 잠들어 있는 오토 3세는 오토 1세의 손자로 3살에 왕위에 올라 고대 로마제국의 부흥을 꿈꾸었다. 황제가 국가와 교회 모두 통치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출발지였던 비텐베르그를 거쳐 온 탓인지 신성로마제국의 심장부인 아헨을 들렀을 때 8월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는 오한에 떨었다. 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 강력한 세속 권력을 바탕으로 성직까지 마음대로 임명하고 파면했던 제국의 역사가 이미 600년 뒤 비텐베르그의 성난 함성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역사의 회한이 밀려온 탓인지 모른다. 동프랑크 왕국의 발전 프랑크왕국은 루드비히 1세 이후 삼분되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발전했다. 오늘날.. 2005. 7. 21.
[39] 카롤링거 왕조의 멸망과 교회의 혼란 J. P 로렌스작 교황 포르모소와 스테파노 6세. 무덤에서 파낸 포르모소 교황의 이 사체재판은 9세기 극심했던 교회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다.  교황권, 권력의 노리개로 전락 896년 가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스테파노 6세 교황이 땅에 묻힌지 9개월이나 지난 포르모소 교황의 시신을 파내 교황복을 입힌 후 단죄하는 사체재판을 거행한 것이다. 나아가 스테파노 6세 교황은 교황 반지를 낀 포르모소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사체를 절단해 티베르 강에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만행에 격분한 로마시민들은 스테파노 6세 교황을 체포해 옥에 가둔 뒤 교살시켜 버렸다. 이 같이 참담했던 교회의 혼란상은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에서부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초기까지 계속됐는데 사가들은 이 시기를 .. 2005.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