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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8) 김성학 신부(1870-1938)

by 세포네 2009.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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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교육사업과 평양교구 초석 다져

 

▲ 김성학 신부

 

"공경하올 주교님, 가실(현 경북 왜관읍 낙산본당)에는 교우가 매우 적어 주교님께서 제게 학교를 세울 의향이 없느냐고 물으셨을 때 학교를 세울만한 학생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간 여러 사람들이 이사해왔고 최근 영세한 사람들이 만일 제가 학교를 세우면 자기 자녀들을 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교님께 상의드리오니 예산이 남으셨으면 다른 곳에 보내신 것처럼 제게도 일부만 보내 주십시오. 저도 학교를 세우고 싶사오며 그것이 제게도 매우 이로울 것 같습니다."

 1898년 가실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성학(알렉시오) 신부는 부임 이듬해인 1899년 가실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뜻을 담은 서한을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부임 3년 만에 인근 김천본당 초대 주임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 신부가 학교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아시도록 주교님께 이 서류를 보내드립니다. 주교님께도 보내드림은 주교님께 보고 드리기 위함이지만 혹시라도 군수가 인가를 얻어주지 못하면 주교님께서 저를 도와 주십사 하는 뜻입니다. 저는 임시로 설립자 겸 교장입니다. 한문 교재로는 「만물진원」(萬物眞原), 「성교감략」(聖敎鑑略),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학부에 제출했습니다."

 김 신부가 1909년 2월 11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 일부다. 김천본당에 부임한 김 신부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땀과 열정을 바쳤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학교가 바로 김천 성의(聖義)학교, 지금의 성의중ㆍ고등학교와 성의여중ㆍ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김천 성의학교를 세운 김성학 신부는 한국교회 8번째 사제다. 1897년 12월 8일 서울 약현성당(현재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이내수(6번째)ㆍ한기근(7번째) 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으나 생일이 가장 늦어 8번째가 됐다.

 김 신부는 1870년 평안남도 은산에서 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최 아가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박해의 시련을 극복하고 후손들에게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당대 천주교인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다.

 김 신부는 1883년 강원도 이천에서 살 때 블랑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돼 4명의 신학생들과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멀리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김 신부는 1934년 「가톨릭 청년」 6월호에서 페낭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만큼 자기나라 말을 쓰지 말고 모두 라틴어를 사용하라는 학교 규칙이 있으므로 처음 들어간 우리에게는 얼마 동안 여간 곤란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귀를 열리게 하고 혀를 풀리게 해야겠다는 각오로 힘써 연구한 결과 두서너 달 후에는 넉넉히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은 다 통하게 되었다. 라틴어뿐 아니라 다른 학과에 있어서도 우리는 '조선의 명예를 위하여'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은근히 분투하여 좋은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출발 때부터 기후와 음식으로 고생했던 이들 유학생 중 다수는 페낭에서 조선과 전혀 다른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많은 고생을 했다. 결국 24명의 페낭 유학생 가운데 11명만 사제가 될 수 있었고, 사제가 된 이들도 상당수는 요절하고 말았다. 1892년 페낭에서 공부하는 신학생을 모두 불러들일 때 김 신부도 귀국해 서울 용산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제2회 졸업생으로 사제가 됐다.

 첫 부임지 가실본당에서 김 신부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본당 관할인 상주(尙州) 군수가 교우들을 박해하고 전교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학쟁이는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믿고 교우를 때려 죽이는 일도 벌어졌다. 김 신부는 위험한 사태에 단호하고도 현명하게 대처해 나갔다.

 1901년 두 번째 임지 김천본당으로 부임한 김 신부는 10년간 사목하면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육 사업에 많은 공을 세웠다. 1911년 부임한 세 번째 임지는 황해도 장연이었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 직후여서 행정적으로 교회와 총독부 간 갈등이 많았다. 관할 지역 토지 등기 문제, 본당 공동묘지 조성 문제 등 김 신부를 괴롭힌 까다롭고 골치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1916년부터 6년간 김 신부는 용산 신학교에서 후배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김 신부가 신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일어난 3ㆍ1 운동 때 신학생 몇 명이 기숙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으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1922년 김 신부는 이듬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메리놀외방전교회로 관할권이 이양되는 평안도로 파견됐다. 1년간 임시로 전교하다가 1923년 평양본당(관후리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김 신부는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면서 영유본당 주임으로 옮겼다. 이어 1931년 신설된 서포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 신부는 갓 탄생한 평양교구에서 본당 주임과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들 협력자로서 평양교구가 자리를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년간 평안도에서 활동한 김 신부는 1936년 충남 공세리본당 주임을 맡아 서울교구로 복귀했다. 1938년 8월 본당 관할 소동리공소 강당 축복식을 마치고 돌아와 병석에 누운 김 신부는 9월 8일 뇌출혈로 선종했다. 향년 68살이었다.
 김 신부 장례식에는 서울교구 많은 성직자들은 물론 평양교구에서도 한국인 성직자와 신자 대표가 참석해 고인의 공적과 성덕을 기렸다. 김 신부 유해는 공세리성당 묘지에 안장됐다.

 
▲ 김성학 신부(가운데)가 1931년 완공된 평안도 서포 메리놀센터에서 모리스 몬시뇰(오른쪽, 제2대 평양지목구장) 및 홍용호 신부(후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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