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회와 영성]/특집

(6) 한국천주교회 네 번째 사제 정규하 신부

by 세포네 2009. 8. 23.
728x90

    

▲ 정규하 신부

▲  정규하(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가 동기 강도영(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신부의 은경축을 축하하고자 동료 사제들과 함께 1921년 미리내성당 마당에 모였다. 수품 연월일이 같으면 나이 순에 따르는 교회 관습에 따라 강 신부는 세 번째, 정 신부는 네 번째 사제로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됐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후,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풍수원성당엔 의병들이 수시로 찾아들었다. 일본군과 싸우다 쫓기던 터였다. 그런데도 정규하 신부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고 따뜻이 맞아들여 침식을 제공해주며 격려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 본당 신자들 가운데서도 의병에 가담, 일본군과 항쟁하다가 순국하는 이들이 많았다.
 
 #의병들의 전국적 항거에도 망국의 치욕을 당하자 정 신부는 1910년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며 교육사업에 들어간다. 풍수원성당 사랑방을 빌려 설립한 '삼위(三位)학당'이다.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사방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교사로는 충남 논산에서 박 토마씨를 초빙, 한글과 한문,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역사 교재로 「월남망국사」를 채택, 베트남의 예를 들어 독립의 꿈을 키워줬다. 그러나 이 마저도 오래가지 못해 교재는 일본 관헌에 압수당하고, 박 토마씨는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 삼위학당은 1931년 4월 성심학원으로 개칭됐다가 1946년 12월 6년제 광동초등학교로 개편됐으며, 1972년 3월 횡성군으로 운영자가 바뀌면서도 계속 유지됐다. 그러나 1998년 폐교돼 현재는 성당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가난한 삶에서 사제 꿈 키워

 풍수원성당에서만 47년간 사목하며 우국의 삶을 산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

 그는 1863년 8월 18일 동래 정씨 집성촌인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방제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기화(마태오)씨와 모친 한 마르타씨 슬하 3남매 중 장남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혹독한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터라서 정 신부 일가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으로, 충북 음성군 감곡면으로, 충북 충주시 소태면으로 정처없는 여정이었다.

 늘 궁핍을 면치 못했고, 춘궁기만 되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산에 가 나무를 베어 시장에 지고 가 팔거나 암탉을 길러 달걀을 파는 나날에도 소년 정규하는 성소의 꿈을 키웠다.

 그가 신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건 경기도 광주시로 이사하면서다. 1884년 리델 주교 선종으로 제7대 조선대목구장직에 오른 블랑 주교에게 입학허가서를 받은 그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출발,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한기근(바오로)ㆍ최 바오로ㆍ문 바오로(병사) 등과 함께였다. 페낭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그러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귀국,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한 뒤 1896년 4월 26일 한국교회 사상 네 번째로 사제직에 올랐다. 강도영ㆍ강성삼 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은 그는 그해 6월 10일 풍수원본당에 보좌로 부임했다가 두 달 뒤인 8월 17일 르메르 신부에 이어 2대 주임에 임명된다.

 당시 풍수원본당 관할구역은 화천과 인제, 양구, 홍천 등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해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에 이르렀다. 신자 수는 2000여 명이었다. 정기적 공소 방문에만 만 3개월이 걸릴 정도로 힘겨운 사목여정을 정 신부는 열심으로 이겨내며 사목했다.

 본당에 부임한 지 10년째이던 1905년 정 신부는 성당 신축을 꿈꾼다. 초가 20여 칸 성당에 만족하지 못해서였다. 이에 푼푼이 모은 자신의 사재와 교우들의 헌금 8000원을 기반으로 2년 뒤인 1907년 11월 12일 공사에 들어간다.

 중국인 기술자 진 베드로 등을 데려온 정 신부는 강원도 산골짜기에 로마네스크 양식 397.69㎡(120평) 규모 성당을 신축한다.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었고, 국내에선 일곱 번째로 지어진 양식 성당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풍수원본당 신축

 공사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진흙 벽돌이야 신자들이 옹기 가마를 만들어 구웠지만, 목재와 백회, 함석 등 자재운반이 문제였다. 서울까지 250리 길은 풍수원에서 양평까지 사람이 겨우 다니는 작은 길이 있을 뿐이었고, 양평에서 서울까지는 소금배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농사와 생계일을 팽개치고 밤낮을 가리지 않은 채 성당 신축에 매달리는 신자들의 노역으로 기어코 자재를 운반해와 성당을 완공하고, 1910년 뮈텔 주교 주례로 성당을 봉헌한다. 아울러 1912년에는 132㎡(40평) 크기 사제관을 지어 봉헌했다.

 성당 건립과 함께 정 신부는 사제성소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윤근(요셉, 1909년)ㆍ서병익(바오로, 1910년)ㆍ김휘중(요셉, 1917년)ㆍ신성우(마르코, 1920년)ㆍ박일규(안드레아, 1924년)ㆍ정원진(루카, 1926년) 등 6명이 풍수원본당 출신으로 정 신부 재임 중에 사제품을 받았다.

 또 1920년 춘천 곰실공소를 춘천본당(현 춘천교구 죽림동본당)으로, 1923년 홍천 송정공소를 홍천본당으로, 1930년 횡성공소를 횡성본당으로 각각 승격시켰다. 이와 함께 1920년 6월 3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아 성체거동을 시작해 본당의 전통적 성체신심 행사로 정착시켰고, 1921년 8월에는 성부안나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이밖에 정 신부는 의술(침술)에도 상당한 조예를 보여 현대의학이 널리 전해지지 않았던 당시 여러 지방에서 난치병 환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풍수원으로 찾아들었다고 한다.

 1939년 4월 25일 춘천지목구 설정으로 경성대목구에서 춘천지목구로 전출된 정 신부는 1942년 6월 김학용 신부가 보좌로 부임하자 본당 운영을 김 신부에게 위임한 뒤 노환으로 요양하던 중 이듬해 10월 23일 81살을 일기로 선종, 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다.

 어려서부터 품행에 그릇됨이 없고 남달리 총명했으며 자신에게뿐 아니라 모두에게 엄격한 성품으로 한 생애를 산 정 신부는 청빈하고 열심한 사제생활을 통해 당대는 물론 후대 신자들과 사제들에게도 훌륭한 본보기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