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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7) 강성삼 신부(다섯 번째 사제)

by 세포네 200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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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경남지역에서 활약한 첫 한국인 사제...
사목에 전념하다 풍토병으로 7년 만에 선종

 

▲ 강성삼 신부

▲ 1928년 낙성식 직후 명례성당에서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성당은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됐고, 현 공소 성전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했다.


   "지극히 존경하올 주교님, 절영도(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속한 섬)에서 밀양으로 이사를 온 다음 곧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늦게나마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집은 120냥에 샀습니다. 방이 셋뿐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 새로 집을 한 채 짓기로 작정했습니다. 네 칸 짜리 집입니다만, 아직 착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땅이(추위가) 풀린 다음에 시작할 예정입니다."(「천주교 마산교구 40년사」 486쪽)

 강성삼(라우렌시오, 1866~1903) 신부는 1898년 1월 13일자로 뮈텔(조선대목구장)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민가(民家)를 120냥에 구입했다고 적고 있다. 1냥을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7만 원이니, 현재 화폐가치로는 대략 840만 원쯤 된다. 현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 있는 명례본당(현 마산교구 수산본당 명례공소)의 출발이었다.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대구(1886년)ㆍ부산(1890년)ㆍ가실(왜관, 1894년) 본당에 이어 네 번째 본당이었고, 현 마산교구 관할 구역으로론 첫 본당이었다.

 원래는 1897년 6월에 본당으로 설정됐으나 매도인이 집을 비우지 않아 절영도에 있다가 이듬해 1월이 돼서야 명례에 부임한 강 신부는 방 세 칸짜리 민가를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삼아 사목에 들어간다.

 부임 첫 해 본당 관할구역은 밀양과 경주, 언양, 양산, 기장, 동래에까지 이르렀으며, 신자 수는 본당과 15개 공소에 547명(명례엔 78명)이나 됐다. 하지만 관할구역은 1900년엔 밀양과 김해, 창원 일대로 줄었다.

 페낭신학교 재학 당시 풍토병에 시달린 탓에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강 신부는 전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입교자가 늘었고 공소도 서너 곳이나 새로 세웠다. 강 신부는 본당 사목뿐 아니라 낙동강 제방을 쌓는 사업계획을 입안, 농토를 늘이는 데도 크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지병으로 몸이 쇠약한데다 과로로 1900년 초엔 '죽을 지경으로' 앓게 된다. 이듬해 여름엔 몸이 쇠약해져 공소 순회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은 1903년 9월 19일 38살 젊은 나이로 명례성당에서 선종한다. 폐낭 신학생 시절에 얻은 풍토병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1896년 4월 26일 서울 약현(현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도영(마르코)ㆍ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와 함께 한국 땅에서 최초이자 한국천주교회 다섯 번째 사제로 사제품을 받은 지 불과 7년 만이었다. 그의 안타까운 선종은 당시 사제가 되기 위해 걸어야 했던 험난한 여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강 신부가 선종하자 명례본당은 마산본당 소속 공소가 됐고, 1926년 5월 권영조 새 신부가 부임, 다시 본당으로 설립된다. 1928년 8월에 한옥으로 된 성당을 건립한 권 신부는 이듬해 부인회를 창립하는 등 본당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명례는 교통이 불편해 새로운 지역을 물색해 본당을 이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결국 권 신부가 1930년 삼랑진으로 본당 소재지를 옮기며 다시 삼랑진본당 소속 공소가 됐으며, 이후 진영본당을 거쳐 현재 수산본당 관할 하에 있다.

 사목활동 기간이 짧아서인지 유감스럽게도 강 신부의 사목적 발자취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유일한 사료가 강 신부가 절영도와 명례에서 보낸 서한 13통뿐이다. 이 중 5통은 부산 절영도에서, 나머지 8통은 밀양 명례에서 보낸 것이다.

 절영도에서의 사목활동은 알 수 없고, 1897년 말 연말 보고서에서 각각의 공소에 대한 공소록을 남겼으며 미신자들 입교 과정에 대한 언급만 약간 남아있다.

 명례본당에서 사목할 때는 신자들의 냉담 문제와 미신 행위, 참배 문제, 신자들과 관헌 사이에 발생하는 현안 등 사목활동과 관련된 사항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비록 7년 남짓 짧은 사목을 했지만, 강 신부는 박해시대 이후 부산ㆍ경남지역에서 활약한 첫 한국인 사제로서 그 의미는 적지않다.

 이처럼 '부산ㆍ경남의 첫 한국인 사제'로 기록되는 강 신부는 내포 출신이다. 특히 그의 외가는 순교자 집안이다. 내포에 살며 의술이 뛰어났던 외조부 신 베드로는 전교에 힘쓰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현 충남 홍성군)에서 잡혀 해미에서 85살을 일기로 순교했으며, 외숙인 신 아우구스티노도 23살의 나이로 해미에서 순교했다.

 1866년 홍산(현 충남 부여군)에서 태어난 강성삼은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코스트 신부 지도로 1년간 예비 신학교육을 받고 1882년 말레이 반도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던 중 1890년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

 1895년 부산에 파견돼 당시 부산본당 주임이던 우도 신부에게 사목 실습을 받은 뒤 이듬해 사제직에 올라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강 신부의 유해는 명례에서 8㎞ 가량 떨어진 밀양시 삼량진읍 대미공소에 안장됐다가 1971년 9월 부산 용호동 성직자묘역으로 이장됐다.

 마산교구는 강 신부의 사목적 발자취와 신석복(마르코, 1828~1866년) 순교자의 생가가 남아 있는 명례공소 일대를 성지로 조성하고자 지난해 9월 '명례성지조성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성역화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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