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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특집

(3) 순교자의 땅 치중성당

by 세포네 2009.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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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그 곳, 신앙의 샘 고이 흐른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화 물결
1921년 완공된 치중성당, 가톨릭 문화 토착화 전형
농산물로 봉헌, 사제 양식으로…장족말 미사 전례


▲ 동서양 건축양식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치중성당. 적막산중인 치중에 이 성당을 보기 위해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순교자의 땅 치중(茨中)은 잊힌 선교루트 자취를 따라 찾은 차마고도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다. 장구한 티베트 문화를 누려왔던 이 땅은 '아늑한 분지'라는 뜻의 티베트 말 '치중'과 딱맞아 떨어진다. 더칭(德淸)에서 약 80여km 떨어져 있다.
 오늘날 티베트인 시짱(西藏)자치구 얜징(鹽井)마을과 인접한 이곳은 매리쉐산(梅里雪山)과 바이망쉐산(白茫雪山)이 동ㆍ서 그리고 북쪽으로 둘러싸고 있고, 란창강(瀾滄江)이 남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평균 해발고도 4000m가 이르는 협곡속 구름 아래 마을로 옛 티베트인들인 장족(壯族)이 끝없는 고요 속에서 하느님 섭리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중국 여러 소수민족들 가운데 장족을 구별하려면 먼저 '고원홍'이 있느냐를 살피면 된다. 고원홍은 광대뼈와 코가 검붉게 탄 것을 말한다. 직사광선이 강렬한 고원의 옛 티베트 지방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고원홍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본래 장족은 잘 씻지 않는다. 고산지대에서는 건조하고 햇볕이 강해 말끔하게 씻을수록 되레 자외선에 의한 피부 손상이 심해진다. 장족들이 머리에 붉은 터번을 두르거나 모자를 쓰는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다.
 동행한 김상진(스테파노) 신부는 일행에게 고도가 낮은 쿤밍(昆明)에 도착 전까지 가능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으라고 충고했다. 비포장길에 먼지를 뒤집어쓴 일행은 김 신부의 충고를 웃어넘기고 샤워를 했다. 그날 밤 건조한 피부 때문에 온 몸이 가려워 잠을 설쳤다. 이후 모두는 씻지 않고 장족처럼 때가 꼬질한 고원홍으로 점차 변해갔다.
 19세기 중ㆍ후반 프랑스 선교사들은 더칭(德淸)을 중심으로 티베트 땅에 복음을 전했다. 한국에서 병인박해가 시작된 해인 1866년 프랑스 선교사 2명이 처음으로 라마교와 무속만을 알던 치중 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치중을 중심으로 인근 샤오웨이시(小紐西)ㆍ디마뤄(迪麻洛)ㆍ공산(貢山)ㆍ빙중뤄(丙中洛)ㆍ얜징(鹽井) 마을이 빠르게 복음화되자 1905년 홍포시(紅坡寺) 라마승들이 토호 세력들을 이끌고 급습, 성당을 불사르고 프랑스 선교사 2명과 신자 3명을 때려 죽였다.
 신자들은 설산에 버려진 선교사들 시신을 수습해 더 이상 화를 막기 위해 얜징 마을에 안장했다. 아울러 파리외방전교회는 치중에 새 선교사들을 파견했고, 청나라 조정에 선교사 학살과 선교지 파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해 보상금으로 새 성전을 지었다.
 1909년에 착공, 12년 만인 1921년 완성된 치중성당은 오늘날 중국에서 가톨릭 문화 토착화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전통 가옥 위에 고딕 종탑을 올려놓은 성당은 아름다운 티베트 전통 단청으로 내부를 장식했다.
 문화혁명 당시 초등학교로 전용되면서 성경 내용을 담은 성화가 모두 훼손됐지만 천정과 기둥 윗부분에 십자가 문양과 천사화가 아직도 남아 있다. 치중성당은 1987년 중국 인민정부 문화재로 지정됐다.
 

▲ 전례에 참례한 치중 신자들

 

▲ 장족말로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며 미사참례를 하고 있는 치중 신자들.

 

치중에서 가톨릭 문화 토착화 예는 비단 성당 건축물만이 아니다. 장족말 기도와 성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아직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전례 예식을 고수하고 있다. 남녀 신자석이 양쪽으로 엄격히 구분돼 있고, 양손을 엇갈려 가슴에 모은채 영성체를 한다. 헌금 대신 각자 재배한 옥수수, 칭커, 채소와 달걀 등을 봉헌한다. 이 봉헌물이 본당 사제의 일용할 양식이다.

 


▲ 각자 재배한 농작물들이 주일미사 봉헌물로 제단 아래에 가득하다.

 미사 중 아기가 보채자 아기 엄마는 주저없이 훌러덩 앞가슴을 열어 젖을 물린다. 한족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들은 미사 도중 연신 묵주알을 돌린다. 미사 시작과 끝에 신자들은 정성스럽게 장족말 기도문을 공동으로 바치고, 장족 성가로 하느님을 찬미한다. 치중성당 건립 당시 20~30명이었던 신자 수는 현재 주민의 절반인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지난 해 치중본당 임시 주임으로 부임한 내몽골 출신 타오페이(挑飛, 요한) 신부는 "나이든 신자들이 장족말로 고해를 할 때 잘 알아듣지 못해 안타깝지만 사목에 보람을 느낀다"며 "가톨릭 신앙이 전 주민에게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김상진 신부는 "세계에서 장족말로 미사 전례가 봉헌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은 여기 뿐"이라며 "빨리 장족말을 능숙히 익혀 토착화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해 달라"고 당부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 장족말로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며 미사참례를 하고 있는 치중 신자들.

 

▲ 장족말로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며 미사참례를 하고 있는 치중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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