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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13> 제1부 신부의 어머니-먼 길

by 세포네 2008.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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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방대에 담배을 재우며 주모는 문턱에 앉아서 술청 밖을 내다보았다. 설핏하게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심술이 모락모락 냄새를 피울 것 같은 오종종한 입가로 그 심술같은 담배연기가 폴싹거리며 새어나왔다. 위에서부터 두부자루 누르듯 몇 날 며칠 맷돌로 짓눌러놓은 듯 주모는 키가 몽당 빗자루만 했다. 저건 뭐야. 앉으나 서나 그게 그거인 주모가 작은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주막으로 들어서며 경환이 말했다.

‘주모, 서둘러 방 하나 내 주시요.’

우루르 들어서는 그들을 바라보는 주모가 입이 벌어졌다. 혼자가 아니었다. 고개를 꺾은 채 널브러진 범구를 업고 있는 필용이 뒤에 서 있었고, 동냥을 얻으러 왔던 그 때꾸러기 아이마저 졸래졸래 뒤를 따라 들어서지 않는가.

우르르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주모의 목소리가 변했다.

‘뭔 소란이래요?’

‘아무래도 여기서 며칠 묵어야 할 모양이오.’

‘뭔 소리를 그렇게 하신대요?’

‘사람이 이 지경이니 어쩌겠오. 며칠 병구완을 좀 해야 할 모양이니 방 좀 빌립시다.’

‘이거야 원, 누울 자릴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어여 다른 데로 가시구랴.’

주모의 생김새가 벌써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필용이었다. 작달막한 키에 굵은 뼈마디까지, 데리고 가서 살라고 할까 봐 겁난다 싶었던 여자를 향해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허. 무슨 놈의 주막 인심이 이래서야…’

등에 업힌 범구를 추스르며 필용이 으름장 놓듯이 말했지만 주모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암팡지게 내뱉었다.

‘척 하면 삼천리라구, 보아하니 옘병이구만. 데리고 나가요. 어서.’

‘거 주모. 사람이 이 지경인데 좀 심하구려.’

‘그 지경이니 하는 말이지요. 무시로 객이 드나드는 집에 괴질 병자를 들이겠다니. 막 보자는 거요 뭐요?’

약방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었다. 다 죽게 생긴 꼴로 다리 밑에 웅크리고 있는 범구는 몸이 불덩이였다. 열에 들떠서 턱을 덜덜대며 떨고 있는 게 경환이 보기에도 첫눈에 염병이었다. ‘설사도 심하드냐?’

이 일을 어쩐다 생각하며 경환이 난감해서 묻자 때가 꾀죄죄한 딸애는 눈알을 똘망거리며 대답했었다.

‘똥질이 말이 아니예요.’

배워먹은 거라고는, 지 애비 보고 똥질이라네. 안 봤으면 모를까. 보고도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경환은 범구를 들쳐 업었고, 필용을 앞장세워 침쟁이를 찾아가 급한대로 몸을 추스르게 한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모가 그들을 밀어내듯 팔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어서 데리고 나가라니까 그러시네…’

‘등에 소금 뿌리겠오!’

‘소금만 뿌릴까. 엠병을 달고 들어오지를 않나. 이거야 원 삼년 재수 옴 붙게 생겼네.’

‘거 콩단만 한 것이 패악스럽기는.’

‘뭐요, 지금 나보고 한 소리요?’

‘날아가는 기러기 백보지를 보고 한 소리외다. 가기는 갑니다만 사람이 말을 해도 그러는 게 아니요.’

주모가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하이고. 될 일을 가지고 떼를 써야지. 애꾸가 환하게 보자는 거나 절름발이가 먼 길 가자는 소리지… 어디다 엠병쟁이를 들이겠대, 기가 막혀서.’

범구를 업고 밖으로 나가는 필용을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팔 하나가 제 아비에게 달라붙기라도 한 듯 보미는 쪼르르 필용의 뒤에 붙어섰다. 경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필용에게 다가섰다. 둘의 눈길이 얽혔다. 필용이 말했다.

‘왜 날 봐?’

경환이 실없이 웃었다.

‘그래서? 자네가 날 보면…’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어쩌겠나.’

필용이 허허거리며 헛웃음을 웃었다.

‘그만 두세. 말 안 해도 알어.’

고개를 돌려 꾀죄죄한 여자애를 내려다보며 필용이 말했다.

‘니 애비 어디다 팽개칠까 봐 그렇게 따라붙냐? 녀석 하고는. 그나저나 너 이름이 뭐냐?

‘봄이. 봄에 낳았다고 봄이랍니다. 보미.’

‘꼴에 사설은… 그냥 이름이나 말해 이눔아. 니 아부지가 말복에 개잡아 먹다가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 니 이름이 말복이가 될 뻔하지 않았어.’

중얼거리고 난 필용이 경환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달리했다.

‘그러세. 자네 옆에 붙어다녀서 어디 편한 날 있든가. 됐네, 집에 마침 뒷방이 하나 비었으니, 얼추 치우고 그리로 눕히세.’

범구를 업고 필용이 앞장을 섰다. 지어가지고 오는 탕약을 보미에게 흔들어 보이며 경환이 말했다.

‘이거 대릴 수 있겠지? 보아하니 똘똘해는 보인다만.’

보미가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제 애비 가지고 똥질한다던 놈이 말씨는 곱네. 경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엄마는 없고?’

‘저 낳고 돌아가셨답니다.’

‘이 꼴을 해 가지고… 이렇게 둘이 살어? 집도 절도 없이?’

‘네. 벌써 몇 년인데요.’

‘그래 어딜 가던 길이냐?’

‘마름집하고 싸우고, 새경도 제대로 못 받고… 그래서 아는 집 찾아간다고 나섰던 길이예요.’

멀리 휘돌아간 해미성의 석축 위로 저녁햇살이 빗겨들고 있었다. 성 밖에 엎드린 초가집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푸르스름했다. 천주님.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산하는 아름답기가 저토록 심오한데, 어찌 저희들 사는 나날은 이토록 스산하기만 한지 모르겠나이다. 보미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놓치면 큰일이라는 듯 보미는 업혀 있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보미를 내려다보며 경환이 말했다.

‘오뉴월에 개 떨 듯 한다는 말도 있어. 아버지가 많이 추워할 거다. 나는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일은 떠나야 하니, 저 아저씨가 잘 돌봐 줄 거다. 좋은 분이시니 말씀 잘 따르고. 너도 봤지? 아버지 몸에 벌겋게 두드러기 같은 게 돋아 있는 건. 아마 한 열흘 더 고생할 거다. 설사도 좍좍 해댈 테고.’

말해 놓고 나서, 들고 가던 탕약 봉지를 보미에게 넘기며 경환이 필용에게 다가섰다.

‘힘들 텐데, 이제 내가 업을 테니 등을 바꾸세.’

어서 들어가 만과를 드려야겠다. 오랜 만에 만나는 교우 필용이와 저녁기도를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쁜 생각이 경환의 마음속을 선들거리며 바람처럼 지나갔다.

범구와 보미를 필용에게 부탁을 하고 다음 날 경환은 해미를 떠났다. 내가 맡기더라고 하면서 네가 아저씨께 드려라. 꼭 나 가거던 그 다음에 드려야 한다. 그렇게 다짐을 받으며 경환은 남아 있던 노자를 털어 보미에게 맡겼다.

‘이거 받아 두게. 무슨 인연인지 모르지만 어쩌겠나. 저 사람 약값이야 내 책임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돈을 건넸지만 필용은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일이야 자네가 저질렀지만 이 마당에야 그게 내 일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필용은 아내에게마저 이 양반 돈 받았다가는 큰일 날 줄 알라고 못을 박았다.

청양 다래골의 새터로 돌아가는 경환을 배웅하러 나선 필용과 함께 둘은 해미성 밑을 걸었다. 뒤쪽의 낮은 산을 등지고 평지에 쌓은 평산성(平山城)이었다. 성 밑으로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로 쌓으면서 안쪽을 흙으로 채우고 세 개의 문은 세웠다. 성 밖으로 심은 탱자나무가 잎을 떨군 채 울창했다. 멀리 현감이 있는 관아의 지붕 위로 이제 떠날 준비를 하는 철새들이 떼지어 날고 있었다.

이미 시들어 버린 쑥과 웃자라 넘어져 있는 풀숲 사이로 넓직한 바위 하나가 비죽히 드러나 보였다. 자리개 돌이라고 불리우는 위가 평평한 바위였다.

죽일 놈들. 인두껍을 쓰고 할 일인가. 바위를 바라보며 경환이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신유년 박해도 끝난 갈 무렵이라고 했다. 잡아들인 교우들이 옥사에 넘치다 보니, 몹쓸 형리놈들이 사람들 끌고 나와 팔다리를 서로 나누어 붙잡고는 그 자리개돌 위로 들어올렸다 떨어뜨리면서 죽였다고 했다. 엉치와 갈비가 으스러지고 팔다리가 꺾이고 두개골이 터지고, 그렇게 바위 위로 들어올렸다 떨어뜨리기를 거듭하면서 교우들을 죽였다고 했다.

을해년 박해 때만해도 그렇다. 팔도에 흉년이 쓸고 가며 기근이 들자 지방 관아의 몹쓸 것들이 교우들의 재산을 노리고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고 도륙을 일삼았다고 했으니,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이 저지르는 일까지 그 지경에 이르렀었다.

오호라. 천주학쟁이로 잡혀간 그 선조들의 절통함이 어떠했으랴. 어금니를 부스러져라 깨물며 경환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경환아, 바위같아라. 흔들림 없어야 한다. 굳세게 가야 한다. 때가 닥쳐 그날이 오면 너 또한 천주님 무릎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스무 해 남짓 전이라고 했다.

그래도 요즈음은 많이 잠잠해 지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는 하다만… 한시라도 마음에 곁을 두어서 될 때가 아니다.

‘이 보게, 필용이. 나 말일세.’

경환의 목소리는 낮았다.

‘곧 고향을 뜰까 하네. 우선 이번에 돌아가면 집을 잠시 떠날까 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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