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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4) 최양업 신부(중) - 길 위에 지다

by 세포네 200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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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 마리아…" 되뇌다 주님 품에

 

▲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 중 하나인 배티 성지에 세워져 있는 최양업 신부 동상

 

#1. 1860년 9월 3일, 경상도 죽림(현 경북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간월산 산속 어느 곳). 사제 최양업은 두 스승 리브와 신부와 르그레즈와 신부를 비롯한 모든 신부들에게 한꺼번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이 서한이 중국에까지 전달될 수 있을는지도 의심됩니다."
 최양업 신부는 편지 끝 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이로부터 약 9개월이 지난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는 경북 문경 인근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배론의 푸르티에 신부가 달려가 마지막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최 신부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 되뇌다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2. 1850년 1월 의주 관문을 거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중병을 앓고 있던 다블뤼 신부에게 가서 병자성사를 집전했다. 사제로서 조국 땅에서 집행한 첫 성무가 병자성사를 주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최 신부의 행로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최 신부는 이어 충청도로 가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나 하루 동안 함께 지내며 대화를 나눴다. 그게 다였다. 조국 조선은 그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최 신부는 전라도에서부터 공소 순방을 시작해 6개월 동안, 전라ㆍ충청ㆍ경기ㆍ경상 강원 5도를 다녔다.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는", 그래서 사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봐야 고작 40~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수 있는 외진 곳들이 모두 최 신부의 관할지역이었다.
 그해 7월 한 달을 제외하고 1월부터 9월까지 최 신부가 걸은 거리는 거의 5000리, 2000㎞나 됐다. 교우 3815명을 만나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했고, 1764명에게 성체를 영해주었다. 어른 영세자 181명, 아기 영세자 94명, 보례자 316명, 임종대세 455명, 예비신자 등록 278명이었다. 이듬해에는 127개 공소를 순방해 신자 5936명을 만났다.
 
 #3. 그러나 사목순방의 어려움은 힘들고 고된 길을 다녀야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최 신부는 악인들 때문에 거의 항상 반무장을 하고 다녀야 했다. 옷이 찢겨 신발과 갓을 빼앗기고 매로 흠씬 두들겨 맞고, 한밤중에 내쫓겨 강추위에 몸이 꽁꽁 얼어붙고, 능욕과 고통으로 몸과 마음이 기진맥진한 상황을 견뎌야 했다.
 외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밤에만 교우촌에 도착해야 했고,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떠나야 했다.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 준비를 다한 신자들에게 미사를 드려주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최 신부는 자신의 무능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비통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 나쁘고 슬픈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온 가족이 개종하고, 마을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쁜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최 신부는 때때로 자신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 개인에 관한 말씀을 드리자면, 육신으로는 어지간히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만 정신적으로는 날마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옛 청춘의 활기를 몽땅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1857년 9월 15일, 14번째 서한)
 
 #4. 신자들을 찾아 다니는 사목순방을 하던 중 최 신부는 1853년 여름 배티 소신학교 지도신부로 임명돼 이듬해는 신학생 3명을 선발해 말레이반도에 있는 페낭 신학교로 보내기도 했다.
 또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를 비롯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챙기는 데도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베르뇌 주교의 지시에 따라 순교자 행적 조사를 1856년부터 다블뤼 신부가 맡았기 때문이다.
 사목순방을 통해 교우들을 만나면서 최 신부는 한글을 이용한 교리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중요 교리와 기도문 내용을 가사체로 노래한 '사향가'를 편찬하고, 사말(四末)을 노래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을 직접 지어 보급했다.
 최 신부는 특히 1859년에는 여름 휴식 기간에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문본 「성교요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고 교정하는 작업에 참여했으며, 이와 함께 한문본 기도서에서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1860년 여름에 완성했다.
 
 #5. 최 신부는 해가 갈수록 기력이 떨어졌다. 혼자서는 하루에 고작해야 40리밖에 못 걸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관할 구역이 5개 도에 걸쳐 있었고, 더구나 멀리 떨어진 곳은 다 최 신부의 관할이었고, 공소 수도 100개가 넘었다. 어찌할 수 없이 말을 타고 다녔다.
 1859년말부터 1860년 여름까지 경신박해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최 신부는 죽림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다. 박해가 잦아들자 최 신부는 못다한 사목순방의 고삐를 죄었다. 피로가 엄습했다.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몸을 이끌고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순방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하지만 무리였다. 과로가 겹친 데다 장티푸스에 걸려 마침내 최 신부는 길 위에 눕고 말았다.

해마다 7000리 길을 다니던 그 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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