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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10) 제4차 귀국 여행(하)

by 세포네 201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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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도에서 눈물을 삼키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 최양업 부제와 프랑스 해군 560명이 한달간 표착생활을 했던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 모래사장터. 전주교구에서 세운 최양업 부제 일행 난파 체류지 팻말이 있다.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태운 프랑스 함대가 좌초한 고군산도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 자리로 지금은 방조제 간척사업으로 새만금 33센터가 들어서 있다.

 


라 피에르 함장은 함대의 고군산도 좌초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나 미국 함선에 구조 요청을 위해 8월 25일 오늘날 구명정에 해당하는 종선(從船)을 상해로 급파했다. 이 종선은 중국 광동성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 구조를 요청했다.

영국의 수해(Suhae) 함장은 주함인 다이달로스(Dadalus)호와 에스피에글(Espiegle)호, 칠더스(Childers)호를 함대로 편성해 8월 31일 중국 광주 주강을 출발, 9월 5일 고군산도 신치도 앞바다에 도착한 뒤, 12일 프랑스 해군을 모두 태우고 그곳을 떠났다. 라 피에르 함장을 비롯한 300명의 글로와르호 대원들은 다이달로스호를 타고 9월 23일 홍콩에 도착했다. 즈누이 함장과 257명의 빅토리외즈호 수병은 나머지 두 배에 나눠 타고 상해로 갔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도 빅토리외즈호 해군들과 함께했다.


신치산 아래서 한달간 머물러

프랑스 해군은 1847년 8월 10일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에 좌초된 다음 배를 버리고 12일 신치산 아래 남쪽 모래사장에 상륙해 영국 함대에 구조될 때까지 꼬박 한 달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최양업 부제도 1847년 8월 12일 프랑스 해군과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을 떠난 지 무려 11년 만의 일이었다. 최양업은 신치도에 한 달간 머물면서 프랑스 해군 장교와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을 맡아 육지로 들어갈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저는 혹시나 신자들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좀 알아내고 싶어서 날마다 수소문하며 기웃거렸습니다. 저의 동포들을 보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니 크게 위로가 됐습니다. …저녁이 되면 혹시 신자의 거룻배가 우리에게로 오지 않을까 해서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기대도 하고 기도도 하느라고 애가 바짝바짝 탔습니다”(상해에서 1847년 9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통역할 때 조선말을 하지 않고 한자만을 사용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리고 협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함께 배를 탄 조선인에게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며 천주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토록 찾던 신자였다. 바로 1847년 9월 9일이었다.

“한 사람이 제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말고요. 나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시인했습니다.…그는 자기 온 집안이 모두 다 신자이고, 대공소(오늘날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 대소 공소)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우리가 있는 고군산도에서 백 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은 그에게서 9월 11일 “신자 배가 신치도로 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구조선인 영국 함대는 이미 신치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조난자들을 모두 승선시켜 12일 떠나기로 돼 있었다. 최양업은 드디어 입국한다는 희망과 함께 신자 배를 꼭 타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꼬박 이틀 밤낮을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최양업은 약속한 11일에 신자 배를 만나지 못했다. 조선 수병들의 경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신자 배가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했으며,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날 신자 배를 만나지 못한 최양업은 신자들이 자신을 태우러 올 때까지 신치도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라 피에르 함장을 찾아가 “혼자만이라도 신치도에 남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저는 고군산도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이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신치도에 혼자라도 남겠다는 최양업의 판단은 맞았다. 실제로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이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거룻배를 가지고 고군산도에 와서 그해 여름 내내 기다렸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양업은 크게 가슴 아파했다.

최양업은 1847년 9월 12일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 함선에 올랐다. 눈앞에서 조금씩 작아졌다 끝내 사라지고만 고군산도를 보면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기도

최양업은 스승에게 보낸 이 편지 내용처럼 스스로 낙담하여 무너지지 않으려고 더더욱 하느님께 의지했다. 라 피에르 함장이 신치도를 떠나면서 “올해 안으로 다시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밝힌 다짐을 되뇌면서 최양업은 조국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 보소서. 저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같은 편지에서).

고군산도로 다시 올 것이라는 최양업의 기대와 희망은 프랑스 해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최양업의 제4차 조선 입국 여행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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