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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최양업 신부

(9) 제4차 귀국 여행(상)

by 세포네 2016.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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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도까지 갔으나 고국 땅은 밟지도 못하고

 

 

▲ 1858년 새로 건조한 프랑스 함선 라 글로와르 호. 아마도 신치도에 좌초된 라 글로와르 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 라 빅토리외즈 호 함장 리고 드 즈누이 소령. 훗날 제독이 되어 코친차이나를 점령해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든 인물이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2월 말 제3차 변문을 통한 귀국 여행을 실패한 후 이듬해 홍콩으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 글로 작성해 보내온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즈와 신부의 교정을 거쳐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져 시복 자료로 활용됐다.

“지금은 지루하고 긴 여행을 한 후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하루하루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함선을 타고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하신 대로 조선에 상륙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만은 다행히 성공하여 지극히 가난한 우리 포교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홍콩에서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편지에서처럼 최 부제가 기다리던 프랑스 함선은 라 피에르 대령이 함장인 라 글로와르 호와 리고 드 즈누이 소령이 지휘하는 라 빅토리외즈 호였다. 두 함선은 중국ㆍ인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코친차이나(지금의 베트남) 감옥에 억류된 가톨릭 선교사들을 구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해 4월 15일 다낭에서 전투를 벌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두 함선은 중국 광동성 광주에서 정비를 마친 후 세실 함장이 1846년 6월 1일 자로 1838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해 조선 조정에 보낸 항의 서한에 대한 답을 받아내려고 조선 원정길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본 목적은 코친차이나 침공과 마찬가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외교적 이득을 취하는 데 있었다.

최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7년 7월 30일 이 함대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라 글로와르 호에는 장교 21명, 수병 406명이, 라 빅토리외즈 호에는 장교 8명, 수병 125명이 승선했다. 수병 대다수가 전투 경험이 있는 정예 함대였다. 최 부제는 1차 귀국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통역사 역할을 했다.

둘을 태운 프랑스 함대는 중국 광동성 광주 황포(黃浦)를 출발해 주강(珠江) 입구인 호문을 지나 조선 근해까지 순조롭게 항해했다. 8월 9일 제주도 해상을 지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양인 가운데 그 누구도 탐사한 적이 없는 고군산도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두 함선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모래톱에 좌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까지 바닷물이 거의 빠지지 않자 좌초된 두 함선은 곧 파선하고 말았다.

라 글로와르 호 함장인 라 피에르 대령은 8월 12일 아침, 모든 수병에게 하선해 ‘북쪽 또는 북서쪽 2마일(약 3.2㎞) 지점에 있는 섬’으로 철수할 것을 명했다. 철수 과정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하역 중대가 구성돼 가장 먼저 대포를 비롯한 무기류와 탄약 그리고 환자와 어린 수병들이 섬으로 옮겨졌다. 초병들이 수량이 많은 물줄기를 찾아내자 다음으로 식량과 남은 인원들 모두가 상륙했다. 철수 과정에서 승선자 562명 중 최 부제를 비롯한 560명은 무사했으나 수병 2명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다. 이 과정을 조선 수병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군산진 요망감관((瞭望監官-관측병) 윤승규는 프랑스 함대의 좌초 사실을 유진장(留陣將) 조경순에게 즉각 보고했고, 조경순은 다시 전라감사 홍희석에게 알렸다. 그런 후 즉각 군사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좌초된 함선을 조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야영지를 주시했다.

전라감사 홍희석은 바로 헌종에게 장계를 올렸으나 프랑스 함대가 좌초된 지 9일이 지난 8월 18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홍희석의 장계에는 “부안 화도(현 부안군 계화리) 뒷바다의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개펄의 해초 언덕)에 프랑스 함대가 표착했고, 두 함선이 좌초한 신치 풀두렁에서 10리쯤 되는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에 혹은 신치산 아래 모래사장에 프랑스 해군이 상륙해 야영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라 피에르 함장은 8월 13일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조선 수군에게 서한을 통해 ‘1846년 세실이 조선 조정에 보낸 서한의 답을 받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고, 식량과 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라감사는 이 요청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 후 물과 식량, 배 등 필요한 물품을 프랑스 야영지에 공급했다. 또 만경현령, 부안 겸 고부군수, 위도첨사, 여산부사, 익산군수 등을 차사원(差使員, 관찰사가 중요한 임무를 지어 파견하는 관원)과 문정관(問情官, 외국 배가 들어오면 그 사정을 알아보는 임시 관리)으로 임명해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우수사와 연해 각 읍과 진에 관문을 보내 경계토록 했다.

조정은 라 피에르 함장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은 그들이 표류인이 아니라 잠입자였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설사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회문(回文)을 보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과 처음으로 주고받은 외교 문서였다. 최양업 부제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통역사였던 최 부제는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조정에 보낸 한문 서한을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라 피에르 함장은 조선 조정의 답을 전달받지 못했다. 조정의 회문이 신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 군인들은 철수하고 없었다.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는 최양업 신부 편지, 라 피에르 함장 보고서와 홍희석의 장계, 일성록, 헌종실록 등을 근거로 프랑스 함대의 좌초 지점과 야영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차 박사는 2013년 11월 전주교구가 주관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프랑스 함선 좌초 지점은 북위 35도 79분, 동경 126도 50분 인근(현 신시도 33센터 배수갑문 안쪽 인근)이며 야영지는 북위 35도 81분, 동경 126도 48분 인근(신시전망대 광장 일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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