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36 40. 밀고자 한영익과 다산 정약용 한영익이 밀고한 주문모 신부, 정약용이 먼저 달려가 피신시키다 ▲ 다산이 해배된 지 2년 뒤인 1821년 1월 24일에 다산초당 주인 윤문거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 딸(稚女)을 하인 편에 업고 올라오게 해서 사창동에 사는 사제(舍弟) 정약횡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내용의 친필 편지다. 개인 소장. 짧은 방심 1794년 11월 2일, 천신만고 끝에 주문모 신부를 모신 조선 천주교회에 기쁨이 넘쳤다. 신자들은 이전에 가성직 신부에게서 받은 영세 대신 진짜 세례와 성사를 받겠다며 줄을 섰다. 막상 신부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당시 4000명에 달하던 교우의 숫자는 신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신부를 뒷받침할 조직도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신부를 모시려고 마련한 최인길의 .. 2021. 2. 25. 39. 내겐 천국이 두 개입니다 “천한 백정을 점잖게 대해 주니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습니다” ▲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황일광 시몬은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그는 모진 형벌에 다리 하나가 완전히 으스러져 들것에 실려 형장인 고향 홍주로 압송되면서도 명랑한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림=탁희성 화백 내포의 천민 출신 지도자들 초기 교회의 양상에서 지역별로 성격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흥미롭다. 여주나 양근, 충주 및 청주 교회는 양반 계층이 전면에 섰고, 충청도 내포 일대만은 유난히 신분 낮은 일반 백성과 노비 계층이 신자의 주축을 이루었다. 내포 지역의 지도자는 이존창이었다. 「송담유록」에 따르면 그는 홍낙민 집안의 속량 노비의 아들이었다. 같은 책에서 또 “그나마 다행인 것은 .. 2021. 2. 25. 38. 밀정 조화진 신자로 위장한 밀정 조화진에 의해 내포 교회 핵심 세력 궤멸 ▲ 탁희성 화백이 그린 복자 방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밥상. 「벽위편」과 「정조실록」에 한차례 씩 니오는 방백동과 방 프란치스코가 동일인물로 보인다. 자세히 보아 두라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잠깐 주춤했던 교세가 1794년 이후로 날로 커져갔다. 특별히 호서(湖西) 지역은 풀뿌리 교회의 저변을 확장해가며 온 마을이 한꺼번에 신자촌으로 변하는 등 확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체포가 실패로 돌아가자, 장용영(壯勇營)의 별군직(別軍職) 선전관(宣傳官)에게 비밀스런 기찰(譏察) 명령이 자주 떨어졌다. 기찰 포교들은 그들 내부에 밀정을 심거나 각종 감시망을 동원해 신부의 자취를 바싹 쫓았다. 신부의 종적은 묘연했다. 신부가 충청도로.. 2021. 2. 7. 37. 1400대 곤장을 버틴 사내, 박취득 곤장 1400대 맞고도 신앙 증거… 풀뿌리 교회의 횃불이 되다 ▲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온갖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옥졸들이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이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복자 박취득 라우렌시오 초상화. ‘부헝이’와 ‘북실이’들 옛 기록을 보다가 거기 적힌 이름 앞에 울컥할 때가 있다. 앞서 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밀 보고서 별지를 볼 때도 그랬다. 당시 그가 충청도 관내 각 지역에서 검거한 천주교인들의 명단과 그들에게서 압수한 서책과 성물 등의 물품 목록을 적은 것인데, 면천군 관련 기록은 이렇다. “면천의 강주삼(姜柱三), 황아기(黃惡只), 박일득(朴日得)은 깨우쳤으므로 다짐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신귀득(申貴得), 노막봉(盧莫奉), 김의복(金儀福.. 2021. 1. 27. 36. 자책하는 인간, 최해두 “만일 이 모양으로 죽게 되면 어찌 한심하고 가련하지 않겠는가” ▲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한 후 경상도 흥해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최해두는 자신의 배교를 크게 뉘우치고 통회하며 참회록이자 교리학습서인 「자책」을 남겼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벽동의 천주교 조직과 최해두 최해두(崔海斗)는 정광수의 벽동 집과 담장을 잇대고 살았다. 반대쪽에는 조섭(趙燮)이 살았다. 최해두는 윤유일을 통해 입교했던 여주 출신 양반의 후예였다. 명도회원으로 활동했던 윤유일의 숙부 윤현(尹鉉)은 아내 임조이(任召史)와 함께 안국동에 살았다. 최해두는 그 윤현의 사위였다. 윤현의 집에 같이 살다 검거된 심낙훈(沈樂薰)은 윤현의 셋째 딸을 며느리로 삼았던 사돈 간이었다. 심낙훈의 여동생 심아기는 동정녀로 포도청에서 맞.. 2021. 1. 27. 35. 면천 군수 박지원과 김필군 연암 박지원, 지도자급 골수 천주교 신자 김필군을 방면하다 ▲ 연암 박지원 초상화. 집 한 채 값을 주고 산 예수 성화 서학이 온 조선을 관통해 지나가던 시절, 박지원은 서학이 가장 극성했던 충청도 지역에서 면천 군수를 지냈다. 그는 이곳 면천에 1797년 윤 6월 26일에 부임해서 1800년 8월 18일에 이임했다.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은 천주교도 문제로 골치를 썩였다. 천주교도 검거 실적을 놓고 병영(兵營)과 벌여야 하는 신경전도 피곤했다. 온건한 처리를 주장했던 연암은 이 와중에 끼어 큰 애를 먹었다. 연암이 면천 군수로 내려간 이듬해인 1798년이었다. 범천면(泛川面)에 사는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천주교 책자와 성화를 들고 군수 앞에 나타나 자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 수배되자 겨우내 달아.. 2021. 1. 17. 34. 연암 박지원과 이희영 형제 실학자 박제가, 서양 선교사 초빙을 정조 임금에게 진언하다 박지원과 박제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8세기 조선의 대문호였다. 한 시대의 문단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가 「열하일기」 한 꼭지를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은 숨죽여 기다렸고, 또 환호했다. 박지원은 1780년, 44세의 나이로 연행을 다녀왔다. 늘 이점이 궁금했다. 그는 북경성당에 가서 서양 문물을 직접 보았고, 마태오 리치의 묘소까지 찾아갔었다.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그와 북학을 주장한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그의 그룹들은 서학에 대해 어떤 속 생각을 품었을까? 덮어놓고 배척하고, 무조건 사갈시(蛇蝎視) 하지는 않았을 것만 같다. 박제가는 당색이 다른 정약.. 2021. 1. 10. 33. 예수상 전문 화가 이희영 성물 반입 어려워지자 기도문과 성화 책판에 찍어 보급하다 ▲ ‘선미도’. 오른쪽이 정철조가 그린 그림이고, 왼쪽은 이희영이 베낀 모사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각수(刻手) 송재기 초기 조선 교회에서 성화와 성상의 제작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801년 봄,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추국청이 설치될 즈음, 김의호(金義浩)가 송재기(宋再紀)의 집에 책판(冊板)을 찾으러 갔다가 그 집에 피신 와 있던 황사영을 만난 이야기가 「사학징의」에 나온다. 송재기의 직업은 도감청(都監廳)에 소속된 각수(刻手)였다. 「추안급국안」에는 그가 능화판(菱花板)을 새기는 전문가로 나온다. 그의 집은 훈련원 앞 황정동(黃井洞)에 있었다. 능화판의 섬세한 문양을 새기는 각수의 집에 천주교 신자인 김의호가 책판을 찾으러 갔다는 대목이 탁.. 2020. 12. 30. 32. 정광수의 성물 공방 대궐 옆 동네 벽동에 집회소 만들어 미사 봉헌하고 성물 보급 ▲ 「청구요람」에 실린 벽동 지도. 경복궁과 안국동 사이에 벽동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벽동 본당의 천주교인들 1799년에 상경한 정광수(鄭光受)는 벽동(碧洞)에 자리를 잡았다. 벽동은 오늘날 종로구 송현동과 사간동 일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길가인데도 다락처럼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벽장처럼 길게 끼어 있어서, 벽장골 또는 다락골로도 불렸다. 지금은 공사 중인 송현동 미 대사관 직원 숙소 서쪽과 중학동 북쪽 일대에 해당한다. 대궐과 인접한 이곳은 관리들이 들락거리던 고급 술집과 기생집이 연이어,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던 멋쟁이들이 많았다. 이옥(李鈺, 1760~1812)은 「이언(俚諺)」 연작 중 「염조(艶調)」에서 “외씨 모양 하이얀 버선 신.. 2020. 12. 23. 31. 잇닿은 담장 포도청 감시망 피해 신자 가옥 담장 사이에 비밀 통로를 만들다 ▲ 강완숙 골룸바가 왕족인 은언군 부인 송씨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탁희성 화백 그림. 초기 교회의 공간 운영법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失捕) 사건 이후, 천주교 집행부는 부쩍 촘촘해진 포도청의 감시망에서 모임 공간과 조직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꼈다. 말단의 세포 조직은 잘라내면 그만이었지만, 신부나 핵심 조직의 노출은 자칫 조선 교회 전체의 와해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포도청에서는 끊임없이 간자(間者)를 풀어 비선(秘線)에 닿음으로써 천주교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럴수록 조직의 은폐와 접선, 공간 위장을 위한 방법도 강화되었다. 포교를 하려면 불특정 다수에게 손길을 내뻗어야 하고, 이것은 자칫 돌이킬.. 2020. 12. 23. 30.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 가성직 신부들이 난동과 반촌에서 미사와 성사를 베풀다 ▲ 마태오 리치가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관을 쓴 모습. 동파건(東坡巾)으로 불리던 관이다. 위에서 보면 왼쪽 사진과 같다. 로마 교황청에 남은 이승훈과 유항검의 편지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중 중국 및 동인도 관계문서(1791~1792) 속에, 1789년 말과 1790년 7월에 북경의 북당 선교사에게 보낸 이승훈의 편지 2통과 그에 앞서 ‘현젠(Hiuen-Chen)’으로 표기된, 유항검으로 추정되는 인물(항검(恒儉)의 중국음이 ‘헝젠 Heng-jian’이다)이 이승훈 등 교회 집행부에 보낸 편지 1통이 프랑스어 번역으로 남아 있다. 한문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모두 윤유일 편에 북경으로 전해진 편지다. 문서 속 한자의 알.. 2020. 12. 13. 29. 초기 교회의 성화와 성물 순교자 모발이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성물로 몸에 지니다 ▲ 1925년 파리에서 간행된 「조선과 프랑스인 순교자」에 수록된 삽화. 형장에 효수된 천주교인의 머리를 그린 것으로 그 옆에 나무 목패가 함께 걸려있다. ▲ 묵주 형태에 성인 메달이 달린 초기 교회의 성물. 다산영성연구소 제공 봉물짐에 숨겨온 성화와 성물 1784년에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뒤 얼마 못 가서 조선 천주교회에는 1000명에 달하는 신자가 생겨났다. 신앙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앞서 「송담유록」에서 명례방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압수품 중에서 성화 상본이 든 작은 주머니가 사람마다 나왔고, 충청도에서는 신자들이 저마다 상본과 편경 등을 작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기록을 살핀 바 있다. 한편 .. 2020. 12. 13. 이전 1 ··· 6 7 8 9 10 11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