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36 6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신유년 체포령 내리자 상복 입고 김한빈과 배론으로 피신하다 ▲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피해 상복을 입고 성묘 가는 행색을 꾸려 배론으로 피신하던 중 경기도 평구에서 김한빈을 만나 동행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황사영 초상화 한꺼번에 터진 제방 신유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1월에 국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7일에 최필공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새벽, 최필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기찰 중이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새해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인의 전면적 색출을 위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연좌제 실시를 윤음으로 선포했다. 급박한 상황에 정약종은 불안감을 느꼈다. 1월 19일,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이던 교회 서적과 성물, 주문.. 2021. 9. 19. 63. 황사영의 애오개 교회 사당 허물고 성물 제작소 운영하며 조선 교회 본당 역할 손이 귀한 명문가의 유복자 황사영은 명문인 창원 황씨 판윤공파의 후예였다. 황사영의 7대조 만랑공(漫浪公) 황호(黃, 1604~1656)는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었고, 황사영의 증조부 황준(黃晙, 1694∼1782)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판서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든 국가 원로였다. 그의 아들 황재정(黃在正, 1717∼1740)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떴다. 종가가 절손되자, 황준은 황재정이 죽은 지 7년 뒤에 태어난 7촌 조카 황석범(黃錫範, 1747∼1774)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종가의 봉사손으로 들어간 황석범은 1771년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와 한림을 지냈으나,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77.. 2021. 8. 15. 62. 보석처럼 빛났던 소년 황사영 임금의 총애 받던 황사영, 10년 뒤 천주교 핵심 인물로 부상 ▲ 1980년 9월 2일 황사영 묘소 발굴 당시의 모습. 유홍렬 교수와 방계 후손 황영하씨 모습(왼쪽 사진)과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합. 종손 황세환 선생 제공 ▲ 1980년 9월 2일 황사영 묘소 발굴 당시의 모습. 유홍렬 교수와 방계 후손 황영하씨 모습(사진 위)과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합. 종손 황세환 선생 제공 무덤 속 백자합에서 나온 비단천 1980년 9월 2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로 불리는 홍복산 자락에서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의 묘소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무덤 좌측을 일부 개봉하자 관 좌측 하부에 오석 7개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어 놓여 있었다. 곧이어 십자가 좌측 끝에서 청.. 2021. 8. 8. 61. 남대문과 중구 일대의 약국 주인들 서울에만 약국 9곳 등장… 초기 교회 연락 거점·집회 장소 ▲ 약국 또는 약방은 초기 교회 서학을 전파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서울 지역에서 천주교 지도자급 인물로 최창현, 최필공, 최필제, 손인원, 정인혁, 손경윤, 손경욱, 김계완, 허속 등 무려 9명의 약국 주인들이 포착된다. 약값을 어찌 함부로 받겠습니까?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尹)은 최창현과의 관계를 따져 묻는 형조의 공초에,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4년 전인 1797년에 딸의 병 때문에 상경해서 최창현의 집안사람인 최가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약을 지었다. 다른 곳에 비해 약값이 터무니없이 쌌으므로 윤장이 괴이하게 여겨 연유를 물었다. 함께 있던 최창현이 이렇게 대답했다. “천주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사람의 마음속.. 2021. 7. 22. 60.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명도회, 신유박해 이후에도 암흑기 조선 교회 유지한 밑바탕 ▲ 교우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인 이경언이 한 과부에게 권면하고 있다. 이경언은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서적이나 상본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그림=탁희성 화백 ▲ 복자 이경언 바오로 풀뿌리 교회의 든든한 토대 명도회는 일개 신심 단체가 아니었다. 주문모 신부에 의한 명도회 도입은 당시 조선 교회가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한 것과 다름없었다. 기존의 전교 방식과 신자 교육 및 신앙 활동 전반에 걸친 혁신이 명도회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명도회의 출범 직후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는 예상치 않게 명도회의 대성공을 도와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불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박해의 부메.. 2021. 7. 22. 59. 명도회 6회의 조직 구성 명도회, 6회 집단 지도 체제로 의사 결정권 가진 최고 기관 ▲ 대전교구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 전시된 이종상 화백의 순교 기록화 ‘손 요한의 신리 신자들에 대한 염습’. 박해시절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피난길을 떠났던 손 요한은 그때에 순교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염습하기 시작한다. 전염병에 걸리고 부패한 시신을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묵묵히 염습을 하며 묻어주었다. 이런 손 요한의 모습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혈당(血黨)과 집회 형태 명도회의 예상 밖 호응에 고무된 주문모 신부의 행보는 부쩍 바빠졌다. 주 신부는 주일마다 명도회의 지부를 돌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를 행하였다. 「사학징의.. 2021. 7. 11. 58. 명도회의 설립 목적과 운영 방식 입회 방식과 활동 내용 모두 오늘날 레지오 마리애와 같아 ▲ 대만 보인대학에 소장된 「명도회규」의 표지(오른쪽)와 입회시기를 규정한 대목. 명도회규와 설립 목적 명도회는 왜 설립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을까? 「사학징의」의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 중 윤현의 집 구들장 밑에서 나온 책자 목록 중에 「명도회규(明道會規)」 한문본 1책이 있다. 또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한 사학 서적 목록 중에도 「셩모시ᄒᆡ명도희규인(聖母始胎明道會規引)」이란 책이 보인다. 중국의 명도회규는 오늘날 대만 보인대학(輔仁大學) 서회신학원(徐匯神學院)에 소장된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立聖母始胎明道會牧訓)」이 저본이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신공(神工)’, ‘보명(報名)’, ‘육회(六會)’, ‘성모시태’ 등의 주요 술어가 일.. 2021. 7. 4. 57. 명도회의 성격과 설립 시점 국가 탄압에 맞서 1800년 4월 조직화된 신심 단체 첫 설립 ▲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장으로 활동한 정약종이 교리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 그림=탁희성 화백 중간 세포 차단책과 플랜 B 1795년 6월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신부는 전면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신부를 잡기 위해 1798년과 1799년 충청도 교회에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고, 밀정 조화진의 암약으로 충청도 교회는 궤멸 직전 상황에 몰렸다. 1800년 4월에는 양근 교회를 표적으로 한 탄압까지 시작되어, 핵심 인물들이 잇달아 검거되자, 1800년 5월에 정약종이 검거를 피해 급거 상경해야 했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었다. 1800년 당시의 주문모 신부는 국가의 지속적 탄압으로 와해 상태에 놓인 신자 조직의 재건과 강화가 절박했다. 하지만 신부는.. 2021. 6. 27. 56. 무지개 다리는 끊기고 이승훈이 아버지와 친척들 앞에서 읊은 ‘벽이시’에 담긴 뜻은 저문 골짝의 무지개 다리 1785년 3월, 을사추조 적발 직후 이동욱은 집안 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아들 이승훈이 앉은 자리에서 한 해 전 연행에서 구해온 서학 서적을 마당에 쌓은 뒤 불을 질렀다. 이어 서사(西士)에게서 선물로 받아온 각종 의기(儀器)들도 모두 박살 내버렸다. 한때는 자랑과 긍지의 표징이었던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척들 앞에서 앞서 살핀 「벽이문」을 지어 낭독하게 하고 신앙을 버릴 것을 맹세하게 했다. 서학책이 불타 재가 되자 이승훈은 다시 ‘벽이시’ 즉 이단을 배척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시는 이렇다. 하늘과 땅 경계 져서 서쪽 동쪽 구분하니 天經地紀限西東 무덤 골짝 무지개 다리 안개 속에 어둑하다. 墓壑虹.. 2021. 6. 20. 55. 이승훈의 「벽이문(闢異文)」과 「유혹문((牖惑文)」 한국의 첫 영세자 이승훈, 천당지옥설·위천주론 내세워 배교 선언 ▲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권 첫면에 실린 천지창조 관련 항목에 나오는 ‘누지불이’ 대목. 「벽이문」과 천당지옥설 이승훈은 교회사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평생 배교 행동을 반복했고, 이를 확인하는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 그리고 「유혹문((牖惑文)」을 남겼다. 이 글의 진의를 두고도 당시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글에서는 이승훈의 「벽이문」과 「유혹문」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승훈은 1785년 3월,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면서 전향서인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다고 1791년 11월 8일 의금부 공초에서 밝힌 바 있다. 이승훈의 공초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해당 일자 기사에 나온다. 공초에는 당시 진산.. 2021. 6. 10. 54.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상지진(水上池盡)’론 이승훈의 ‘月落在天 水上池盡’, 출처 모호하고 전승 경위 불투명 ▲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에서 1988년 펴낸 오기선 신부의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하권 307쪽에 실린 ‘한국종교인열전’의 제15화 「황사영」①의 삽화에는 이승훈의 사세시가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지지진(水止池盡)’이라 적혀 있다. 달은 져도 하늘에 있지만 이승훈의 사세시(辭世詩)는 1801년 2월 27일 서소문 형장에서 목이 잘리기 직전 자신의 심회를 토로했다는 두 구절,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상지진(水上池盡).” 여덟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도 초기 교회사에서 이승훈의 호교(護敎)의 증거로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두 구절은 전승 과정이 모호하고, 어떤 문헌적 근거도 없이 1960년대에 갑자기 돌출한 증언에 의한 것.. 2021. 6. 10. 53. 기억의 착종과 기록의 사각지대 판결 전 고문으로 죽임 당한 순교자, 「사학징의」 명단에서 누락 ▲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 「신미년백서」. 가톨릭평화신문 DB 「사학징의」에 누락된 「신미년백서」 속 순교자 스쳐 가는 기록 속에 보석이 박혀 있는 수가 있다. 한쪽에서 지워져 말소된 정보가 다른 기록을 통해 보정되기도 한다. 기록의 교차 검토가 반드시 필요한 까닭이다. 반대로 상이한 내용을 담은 두 가지 정보로 인해 실상 파악에 혼선이 빚어질 때도 있다. 특히 세례명의 경우 이같은 착종이 비교적 심하다. 본인의 기술과 뒷 시기 제3자의 기록이 엇갈릴 때는 본인의 진술을 따르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중국의 세례명과 조선식 세례명이 엇갈릴 때는 문제가 더 복잡하게 꼬인다. .. 2021. 6. 9. 이전 1 ··· 4 5 6 7 8 9 10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