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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36

52. 동정녀 신드롬 동정 지키려 과부로 행세하며 함께 모여 신앙 공동체 형성 ▲ 정순매 바르바라가 동정을 지키고자 신분을 위장해 거짓으로 머리를 올리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나도 아가타 성녀처럼 「사학징의」 속에는 동녀(童女)가 여럿 나온다. 동녀란 동정녀, 즉 신앙을 이유로 순결을 지켜 혼인하지 않는 여성을 말한다. 말하자면 수녀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그녀들은 어째서 동녀의 삶을 선택했을까? 동녀의 신앙적 근거는 어디에서 나왔나? 「사학징의」에 나오는 동녀는 윤운혜의 언니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정광수의 누이동생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 심낙훈의 누이동생 심아기(沈阿只) 바르바라, 이합규의 누이 이득임(李得任), 정분이의 친척 박성염(朴成艶), 조섭의 누이 조도애(趙桃愛) 아나스타시아, 강완숙 집에 살던 김달님(.. 2021. 5. 23.
51. 주인이 세 번 바뀐 여종 영애 노비 매매 증서가 신원 보증서 역할… 비선 조직 연결하는 연락책 ▲ 「사학징의」에 나오는 정약종의 여종 영애 관련 기사. 미심쩍은 여종 사학 죄인이 대역부도죄로 사형되면 그 집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국고로 귀속되어야 할 몰수 재산 중 돈이 될만한 것은 중간에 다 털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다. 크게 한몫 잡는 일이어서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혈안들이 되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썼다. “정약종의 재산은 정부의 특별한 명령으로 모두 몰수되었다. 그의 적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집안이 복권되는 것을 영구히 막아, 복수를 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한 것 같다.” 이 와중에 정약종의 여종이었던 영애(永愛)에 대한 처분 문제가 불거졌다. 「사학징의」를 보면 1801년 4월 22일 호조에서 형조로 공문을.. 2021. 5. 23.
50. 사학 매파 3인방 사학 매파, 이집 저집 다니며 교리 가르치고 교회 허리 역할 ▲ 복자 정복혜 간지대 ▲ 옥에 갇힌 사학 매파 정복혜 간지대. 탁희성 화백 그림 교회의 허리 「사학징의」의 공초 기록 속에서 사학(邪學) 매파(媒婆)로 일컬어진 사람이 셋 있다. 복자 정복혜 간지대(칸디다)와 복자 김연이 율리아나, 비녀 윤복점 레지나가 그들이다. 정복혜는 4월 2일에 처형되었고, 김연이는 5월 22일에 처형되었으며, 여종 윤복점은 배교로 목숨을 건져 5월 18일에 영해(寧海)로 유배 갔다. 「사학징의」 중 비녀 윤복점의 형추문목(刑推問目)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너는 본시 사학의 매파(媒婆)로 양반 천민 할 것 없이 들락거리며 속여서 꾄 것이 이미 여러 해이고, 다닌 곳이 몇 군데나 되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사학 노파로 .. 2021. 5. 23.
49. 간지대 정복혜와 성녀 칸디다 복자 정복혜 간지대, 같은 세례명 중국의 서 칸디다와 닮은꼴 ▲ 마태오 리치, 탕약망, 서광계 등과 나란히 그려진 서 칸디다의 초상화와 그녀의 은제 십자가 문구. 간지대, 간거다, 칸디다 세례명을 살피다 보니 유독 「성년광익」에 없는 간지대(干之臺)란 이름이 궁금해진다. 간지대는 복자 정복혜(鄭福惠)의 세례명이다. 그녀는 1801년 2월에 붙들려와서 4월 2일에 처형되었다. 간지대는 대체 어디서 온 이름일까? 「성년광익」에도 없는 성녀 이름을 정복혜는 어떻게 자신의 세례명으로 쓸 수 있었을까? 「사학징의」에 따르면 그녀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이합규(李鴿逵)였다. 그녀는 1791년경 입교한 것으로 나온다. 또 「사학징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에 한신애의 집 땅속에서 파낸 .. 2021. 5. 2.
48. 세례명 퍼즐 풀기 중국음으로 읽어야 원음과 비슷… 어감 좋고 예쁜 글자로 대체 ▲ 「성년광익」 마이야본 1월 목차. ▲ 「성년광익」 한글본 목차. 중국음으로 읽어야 풀리는 퍼즐 중국에서 쓰는 한자 이름은 중국 발음으로 읽어야 원어와 비슷해진다. 중국의 한자 이름이 조선으로 건너와 현지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앞글에 이어 세례명을 특정하지 못한 몇 가지 예들을 마저 살펴보겠다. 먼저 최조이(崔召史)의 세례명 이사발(二四發)은 엘리사벳(Elisabeth)을 가리킨다. 중국어 표기 의살백이(依撒伯爾)를 ‘이사보얼’로 읽는데, 줄여 읽으면 이사발로 들린다. 이사발을 중국음으로 읽을 경우 ‘얼쓰파’가 되어 영 딴말이 되고 만다. 흔히 이사벨에 해당하는 이름이다. 남판서 댁 여종 구월(九月)은 「추안급국안」에 박파투다(朴婆.. 2021. 5. 2.
47. 세례명 이야기<상> 초기 교회 신자들, 겉으로 표나지 않게 세례명 바꿔 불렀다 ▲ 초기 교회 신자들은 원래 여러 글자로 된 세례명을 두 글자나 세 글자로 축약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사진은 「사학징의」-정법죄인질에 보이는 보이는 세례명(왼쪽)과 「사학징의」-조혜의의 공초 기록 중 세례명 부분(오른쪽). 「사학징의」 속 정체 모를 세례명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세례명을 어떻게 정했을까? 그들은 성인 성녀의 이름과 행적을 어떤 경로로, 어느 범위까지 알 수 있었나? 세례명은 왜 이렇듯 쉬 알기 어렵게 다양한 형태로 표기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살펴보겠다. 유관검은 「사학징의」에 수록된 공초에서 세례명이 “서양의 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본떠 짓는 것”이라고 했고, 정복혜(鄭福惠)도 공초에서 “사호를 부르는 .. 2021. 4. 18.
46. 충주 교회의 저력 신분·직능·성별 역할 분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충주 교회’ ▲ 프랑스 국가도서관 소장 「성교공과」 아침 기도 오배례(五拜禮) 부분. 신유박해 때 충주 지역 신자로 순교한 이부춘은 최후 진술에서 십계와 오배를 쉬지 않고 강습했다고 자백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기연 집안의 신앙 이기연 형제가 선두에서 이끈 충주 교회는 교회 창립기부터 다져온 저력이 있었다. 충주 교회는 당시 전국의 거점 지역 중에서 가장 기반이 단단하고 균형이 잡힌 차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충주 교회의 출발은 이기연 이최연 형제가 권일신 집안과 사돈을 맺고, 그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충주에 살던 권철신의 처남 남필용(南必容, ?~1801)과 권철신의 사위 이재섭(李載燮) 등이 충주 교회의 출범을 함께 도.. 2021. 4. 18.
45. 충주의 사도 이기연 형제와 충주 교회 충주의 사도 이기연, 북도로 귀양 가서도 천주교 씨앗 퍼뜨리다 ▲ 충주목의 관아골이 있던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충주시 봉방동의 옛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부지)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충주의 사도 이기연과 이부춘·이석중 부자, 권아기련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임성빈 제공 충주의 최고 명문 가문 조선 교회 출범기의 지역 교회사에서 그 실체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바로 ‘충주 교회’이다. 충주 교회에는 충주의 사도 이기연(李箕延, 1739~1801)과 그의 아우 이최연(李最延, ?~?)이 있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이기연이 1801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했다가 다시 신앙을 증거하여 63세의 .. 2021. 4. 4.
44. 사학(邪學)이 아니고 정학(正學)입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서학과 한 치 어긋남이 없는데 어찌 사학인가” ▲ 조아생 부베의 「천학본의」 중 “하느님은 임금이요 아비며 스승으로 명령의 권세가 있다”는 교리를 고대 유교 경전의 말로 이어서 설명한 내용이다. 각 구절 끝에 출전을 적었다. 밑줄 친 부분이 홍교만이 공초에서 대답한 인용과 일치한다. 유가 경전으로 사학을 설명하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801년 2월 의금부로 잡혀갔을 때 나이가 64세였다. 「추안급국안」에 2월 14일과 2월 15일, 「추국일기(推鞫日記)」에 2월 20일의 공초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 속에 홍교만이 심문관과 서학이 사학(邪學)이냐 정학(正學)이냐를 두고 벌인 논쟁이 나온다. 2월 14일에 심문관이 “네가 이미 이 책을 보아 이 학문이 바른지 삿된지를 변별할 수.. 2021. 3. 28.
43. 홍교만·홍인 부자와 포천 교회 포천의 사도 홍교만, “예수의 학문이 정학이다” 당당하게 선언 ▲ 춘천교구가 2014년 순교 성지로 선포한 포천 홍인 레오의 순교터에 세운 현양비.(김승한 제공)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74년 통문. 홍교만의 이름이 서명자의 첫머리에 나온다.(김승한 제공) 홍교만 집안의 신앙 홍교만(洪敎萬, 1738~1801)은 1801년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이승훈과 한 날 목이 잘려 순교했다. 정약용은 「추안급국안」에 실린 1801년 2월 13일 자 의금부 공초에서 “포천의 홍교만 또한 유명하고, 제 형과는 친사돈 간이며, 홍주만의 아우입니다”라고 진술했다. 함께 형이 집행된 인물들의 면면과 정약용의 진술로 당시 홍교만의 교계 내 위상이 드러난다. 아들 홍인(洪, 1758~1801)과.. 2021. 3. 28.
42. 집 나가는 아우들 홍교만과 이기연, 제사 지내지 않으려고 형이 통곡해도 가출 ▲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돈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받아 자신의 집에 숨겨 두었다.(탁희성 화백 그림) 홍교만은 서울에서 지내다가도 부친의 기일이 되면 제사를 피해 포천 자기 집으로 슬며시 돌아가 자리를 피하곤 했다. 제사를 지내느니 혈연을 끊겠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제사 문제였다. 특별히 1790년 구베아 주교의 사목교서가 조선 교회로 전해진 뒤로 더 했다. 윤지충의 막내아우 윤지헌(尹持憲)은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전라도 고산(高山)의 이존창의 집에 여러 날 머물 당시, 신부를 만나기 위해 고산으로 찾아갔다. 이후 전주 유관검의 집으로 내려와 머물자, 다시 신부를 찾아가서 만났.. 2021. 3. 10.
41. 별라산의 별난 사람 홍지영·강완숙 내외 강완숙 남편 홍지영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7촌 서조카 ▲ 1872년 덕산군 지도에서 별라산 인근을 화대한 지도. 홍지영의 별라산과 원백돌의 응정리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을 모은 「수기」는 1790년 진산 사건 이후 충청도 초기 교회의 생생한 현장 정보를 중계한다. 탄압 대상의 동향과 활동 정보 및 관련자 색출에 대한 보고서라서 그렇다. 「수기」에서 특별히 지속적 주목 대상이 된 인물 중 하나가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이다. 1791년 12월 2일에 정조에게 보낸 비밀 공문에서 박종악은 이 지역의 호법(護法)하는 무리로 덕산 별라산(別羅山)의 홍지영(洪芝英)과 홍주 응정리(鷹井里)의 원백돌(元白乭)을 꼽았다. 별라산은 고지도에는 별아산(別鵝山)으로 나온다. 한편 박종악은 1792년 .. 2021.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