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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36

[그때 그 순간 40선] (41·끝) 연재를 마치며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 초기 ‘복음의 영성’ 되찾을 때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식이 거행되는 서울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에 모인 100만 가톨릭 신자들이 태극기와 교황기를 흔들며 상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환영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공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식이 거행된 서울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에 모인 100만 가톨릭 신자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공 240년 전 평신도 신앙 공동체로 출발 올해 2024년 갑진(甲辰)년, 한국 천주교회사 240년을 돌아보며 마무리해본다. 지금부터 꼭 240년 전 갑진년에 이승훈은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에 방문했다가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양 수표교 인.. 2024. 10. 27.
[그때 그 순간 40선] 40. 1962년 교계제도 설정 교황령 「복음의 비옥한 씨」 반포, 3개 관구 아래 11개 교구로 편제 1932년 3월 10일 교황령 「복음의 비옥한 씨」를 반포한 성 요한 23세 교황 성 요한 23세 교황, 교계제도 설정 교황령 반포 해방과 전쟁·휴전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재건 노력은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의 교회 탄압은 야당 견제와 관련이 있었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張勉, 요한, 1899~1966)과 가톨릭교회를 하나로 생각한 것. 이승만 정권은 1959년 서울대목구에서 간행했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으나 국내외의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폐간을 철회하고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정변)로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군사정부는 자신.. 2024. 10. 21.
[그때 그 순간 40선] 39. 한국전쟁과 교회의 구호활동·재건 전쟁의 상흔 딛고 한국 교계제도 설정… 1962년 독립된 교구 탄생 메러디스 빅토리호 교황사절 번 주교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1948년 8월 15일)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는 북한정권(1948년 9월 9일)이 수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비슷한 시기에 독일도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정권이 수립됐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교회가 교육·출판·빈민 구제 등 분야별로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반면, 북한에서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탄압을 시작으로 이른바 ‘침묵의 교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노기남 주교와 라리보 주교는 성년(聖年)을 맞이해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을 향해 사도좌 방문(Ad Limina)을 떠났다. 그 사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 2024. 10. 13.
[그때 그 순간 40선] 38. 해방시기 한국 천주교회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해방 맞아… 교황청, 가장 먼저 독립 승인 「가톨릭청년」 5권7호(1947년 10월 1일 간행)에 실린 한국에 도착해 환영받는 초대 주한 교황사절 ‘하느님의 종’ 패트릭 번 주교.(왼쪽에서 세 번째) 재단법인 현담문고 제공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 ‘고유서’ 발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날은 성모 몽소 승천 첨례일(성모 승천 대축일)이었다. 믿을 교리로 반포된 것은 1950년이지만 교회는 벌써 6세기에 ‘성모님의 잠드심(Dormitio)’이라는 이름으로 성모 승천을 기념하고 있었다. 국가가 해방을 맞이하듯이 우리 교회도 해방을 맞이했다. 금지된 성가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있었고, 한국어로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성당의 종(鍾).. 2024. 10. 6.
[그때 그 순간 40선] 37. 한국인 첫 주교의 탄생 1942년 12월 20일 노기남 주교 성성… 한국인 최초의 주교 탄생 노기남 대주교가 1942년 12월 20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한국인 첫 주교로 성성식을 마친 후 신자들에게 첫 강복을 주고 있다 일제, 천주교계에 신사참배 강요 일제는 1920년대부터 천주교계에 신사(神社) 참배를 강요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천황의 사진에 경례하는 것은 미신이 아니지만, 신사에서 행해지는 예식에 참배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1925년에 간행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와 1932년 반포된 「조선 선교지 공동지도서」에도 명시적으로 신사참배 금지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교회가 신사참배를 금지한 이유는 이를 ‘이교 숭배 의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해 교회법을 적용하여 ‘악표양의 위험이.. 2024. 9. 29.
[그때 그 순간 40선] 36.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 대목구 설정 100주년 맞은 1931년 ‘조선지역 공의회’ 처음 열려 1931년 조선지역 공의회에 참석한 주일 교황사절 에드워드 무니 대주교(가운데)와 주교단·사제단.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일제 통제에도 문화활동·신심 운동 펼쳐 일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교회에 대한 여러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사립학교령」으로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학교를 탄압하고, 「포교규칙」으로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한국 교회는 독자적인 문화활동과 신심 운동을 펼쳐나갔다. 1925년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그해에 열렸던 바티칸선교박람회에 한국 교회에서 모은 800여 건의 귀중한 유물들을 보냈다. 이 유물들은 전시가 끝나고 바티칸 민족학 박물관에 보관돼 한.. 2024. 9. 15.
[그때 그 순간 40선] 35. 순교복자의 탄생과 순교신심 죽음으로 신앙 증거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복자로 탄생 1925년 7월 5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비오 11세 교황 주례로 한국 순교자 79위(기해박해 70위·병오박해 9위) 시복식이 거행되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위 시복 청원 교구가 분리되고 교세가 성장하면서 한국인 성직자의 비중도 계속 높아졌다. 1910년 당시 한국인 성직자는 15명이었는데, 1936년에는 100명을 넘어서게 됐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 한국인 사제는 132명으로,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102명)보다 더 많아졌다. 물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추방된 이유도 있었지만, 그 후로 한국인 사제는 줄곧 외국인 선교사 수보다 많았다. 일제 강점기 .. 2024. 9. 8.
[그때 그 순간 40선] 34. 천주교 독립운동과 대목구 분할 일부 신자와 사제, ‘정교분리’ 원칙에도 독립운동 적극 참여 대구대목구에 모인 드망즈 주교와 뮈텔 주교 등 프랑스인과 한국인 사제들.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일제, 정교분리 원칙 내세워 회유하고 설득 병인박해(1866) 직전 흥선대원군이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의 침입을 막아주면 종교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협상 전에 박해가 일어났고,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하였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긴 협상을 통해 1894년 노불동맹(露佛同盟, 러불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자연스럽게 프랑스 선교사들도 친러시아·반일본 입장을 갖게 되었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청일전쟁 이후 고종에게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라고 권유하기도 했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중국 상해에 피신 중인.. 2024. 9. 2.
[그때 그 순간 40선] 33. 안중근 토마스의 신앙생활과 의거 안중근, 참된 천주교인이며 국권 지키기 위해 순국한 청년 신자 숭공학교 학생과 성 베네딕도회 신부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에 수록돼 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국채보상운동 주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할 무렵, 많은 이가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으로 국가의 독립을 지키려고 뜻을 모았다. 1907년 대구의 신자인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 1850~1913)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 대한 국채를 갚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3년간 전국 사회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어 국민 애국 운동으로 확산했으나, 일본인의 방해 공작으로 1910년 봄에 해산되고 종결됐다. 흔히들 ‘천주교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쉽게 비판한다. 심지어는 천주.. 2024. 8. 25.
[그때 그 순간 40선] 32. 수도회의 진출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어 1909년 베네딕도회 진출 1888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4명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를 맞이하는 블랑 주교. 출처=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조선에 첫 진출 개항기 이후 천주교 금교(禁敎) 조치가 점차 완화될 무렵, 블랑 주교는 교회 사업을 도울 수도회를 찾기 시작했다. 1885년 서울 곤당골에 집 한 채를 사들여 보육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는 박해시기부터 있었던 ‘성영회(聖嬰會)’를 좀더 체계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약을 보급하기 위한 시약소와 양로원을 준비했는데, 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 보육원과 양로원을 관리해 줄 수녀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88년 마침내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 2024. 8. 25.
[그때 그 순간 40선] 31. 교안(敎案) 갈등을 풀기 위한 협약들 “선교사는 행정에 간여하지 않고, 지방관은 신앙행위 침해 말라”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조선 지방국장, 1899년 3월 ‘교민조약’ 제시 박해시기 조선 정부로부터 오해를 받아온 천주교가 용인되기까지 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울 밖에서 주로 벌어졌던 교안(敎案)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프랑스 정부는 일종의 ‘약정(約定, 약속하여 정함)’을 맺었다. 1895년 고종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와의 만남에서 천주교 박해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지역마다 갈등이 일어났다.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초까지는 관리와 비신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권리와 재산을 침해하는 양상이 많았던 반면, 1890년대 후반부터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사건 발생의 .. 2024. 8. 11.
[그때 그 순간 40선] 30. 양대인(洋大人)과 교안(敎案)의 시기 교안(敎案)의 시대는 종교·선교 자유 향한 과도기… 입교자는 늘어1901년 제주교안 당시 무장봉기한 토착민에게 살해된 천주교 신자들 시신. 가톨릭평화신문 DB 양이(洋夷)에서 양대인(洋大人)으로 호칭 바뀐 선교사 1886년 조불수호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의 보호 안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됐다. ‘서양 오랑캐’를 뜻하는 양이(洋夷)에서 귀빈이라는 의미의 양대인(洋大人)으로 호칭이 바뀌고, 옷도 상복에서 수단(soutane)으로 성직자 신분을 드러냈다. 선교사들의 지위가 높아지자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의 위세를 이용하여 비신자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교민(敎民)이라고 불리던 천주교 신자들과 평민(平民)이라 불리던 비신자들 사이의 갈등 안에는, 조선 정부의 부패한 탐관오리들로부터 자신들의 .. 2024.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