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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36

16. 행간에 감춰진 뒷이야기 “그를 벌주려면 나도 같은 책을 읽었으니 함께 벌을 주시오” ▲ 안정복이 을사년 10월 9일에 쓴 친필 일기로 제6행에 이기성이 추조적발 당시 함께 참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양수본 「벽위편」에 실린 하단 주석 내용으로 추조적발 사건이 하동의 역옥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변명의 속사정 을사추조적발 사건은 풀어야 할 뒷이야기가 적지 않다. 현재 전하는 두 종류의 「벽위편」 중 양수본(兩水本)의 첫 면에 성균관 동재(東齋) 유생 정서(鄭) 등이 사건 발생 직후에 낸 통문(通文)이 본문 없이 제목만 나온다. 이 통문은 을사추조적발 사건의 처리 경과를 지켜보다가 이들이 분개해서 성명을 밝히지 않은 채로 발표했던 글이었다. 이 글의 본문은 이만채 본 「벽위편」에 실려 있다.. 2020. 8. 30.
15. 을사추조 적발 사건의 막전막후 김범우만 가두고 사대부 집안 자제 모두 무죄 방면한 까닭은 ▲ 1785년 봄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삼형제 및 권일신 등은 종교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형조관리에게 발각돼 체포되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중인 신분이었던 김범우만 감옥에 갇혀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1786년 사망했다. 그림은 탁희성 작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공적집회도’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가톨릭평화신문 DB 이상한 집회 현장 1785년 3월, 명례방 추조 적발 사건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 보자. 명례방 집회 적발 현장에서 정작 당황한 것은 형조의 포졸들이었다. 얼굴에 분까지 바른 양반가의 자제들이 푸른 두건을 쓴 채, 푸른 제건(祭巾)을 한 키 큰 사내를 중심으로 빙 둘.. 2020. 8. 23.
14. 그들은 왜 얼굴에 분을 발랐을까 집회 참석자 대부분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다 ▲ 김태 선생의 ‘명례방 집회’. 명동대성당 소장. 이벽의 설법 장면과 제건(祭巾)의 모양 「벽위편」에 실린 이만채(李晩采)의 글이다. “을사년(1785) 봄,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掌禮院) 앞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설법하였다. 이벽이란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 드리운 채 정 가운데 앉아 있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를 일컬으며 책을 낀 채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며 가르치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의 사제의 예법에 비하더라도 더욱 엄격하였다. 날짜를 약속해서 모인 것이 거의 몇 달이 지났으므로,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인 자가 수십 인이었다. 추조(秋曹.. 2020. 8. 18.
13.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8일 피정 권일신,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내다 ▲ 「성경광익」 표지와 「성경광익」 앞쪽에 수록된 ‘피정근본’ . ▲ 원주 문화영성연구소 소장 한글본 「성경광익」 11책. 표지에 성경직해로 썼으나, 내용은 성경광익이다. 권일신이 용문산 절에서 가진 최초의 피정 1785년 3월 명례방의 집회가 추조에 적발되면서 천주교 신앙 집단의 존재가 수면 위로 처음 드러났다.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 1728~1803)은 뜻밖에도 문제를 키우지 않고 중인(中人)인 김범우(金範禹, ?~1786) 한 사람만 처벌한 뒤 서둘러 사태를 봉합했다. 관련자들이 모두 쟁쟁한 집안의 후예들이어서, 자칫 큰 파란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이 와중에 리더였던 이벽이 그해 초가을에 전염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조선인으로서 .. 2020. 8. 6.
12. 그늘 속의 사람, 정약현 하나는 죽고 둘은 귀양… 가문 지키려 아우 시신마저 거부 ▲ 정창섭 작 ‘성 정하상 바오로 가족’. 왼쪽부터 복자 정약종의 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부인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배 건너요!” 2018년 6월 12일, 필자가 다산의 여유당이 자리한 마재로 다산의 먼 일가인 정규혁 바오로 선생댁을 찾았다. 평생을 마재에서 사신 분으로, 92세의 연세에도 기억이 맑고 말씀이 곧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온 마을에 찢어진 한적(漢籍)이 바람에 낙엽처럼 뒹굴던 얘기부터, 중공군 장교 하나가 틈만 나면 옛집 다락에 올라가서 그 많은 책을 여러 날 읽고 갔더란 얘기를 들었다. 집안에 구전된 이야기도 있었다. 정약종이 사형당한 뒤 목 잘린 시신이 배에 .. 2020. 7. 26.
11. 홍유한의 남인 인맥과 서학 공부 홍유한, 책상자 지고 산사에 들어가 천주교 교리 탐구 홍유한의 남인 인맥 홍유한의 남인 인맥은 참으로 대단했다. 종손가에 보관된 「가장간첩(家藏簡牒)」과 「가장제현유고(家藏諸賢遺藁)」 및 간찰 자료에는 당시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총출동하고 있다. 남인 학맥의 정점에 선 성호 이익의 편지만 해도, 홍유한의 부친 홍창보(洪昌輔)에게 보낸 편지가 9통,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57통이나 남아있다. 성호의 문집에는 57통 중 단 1통만 수록되었다. 성호와 홍유한 가문과의 왕래는 알려진 것처럼 단순치가 않다. 홍유한의 부친 홍창보를 위해 써준 「독행홍공묘지명(篤行洪公墓誌銘)」에서 성호는 홍창보가 자신과는 40여 년간 가깝게 지낸 벗이라고 적었다. 문집이 남아있지 않은 권암 권철신 부자가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2020. 7. 19.
10. 여사울 신앙 공동체의 출발점 홍유한이 뿌린 씨앗, 여사울 100호 중 80여 호에서 신앙의 싹 터 여사울은 여우골이다 충남 예산의 여사울은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이 1757년부터 1775년까지 18년간 살았던 곳이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도 같은 시기에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1801년 신유박해에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순교자가 이어진 초기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다. 김대건, 최양업 두 사제의 출신지도 인근이었다. 여사울 성지의 답사기나 지명 설명에는 으레 여사울이 ‘여(如)서울’ 즉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풀이가 보인다. 내포 평야가 교통의 요지여서 일찍부터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획득한 백성들이 .. 2020. 7. 19.
9. 광암 이벽,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이벽 요한, 고결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로 세상을 울리다 강물 같은 언변과 고상한 품행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은 멋진 남자였다. 외모가 훤출했지만 정신의 광휘로 더욱 빛났다. 그는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다산 보다 여덟 살 위였다. 그런데도 다산은 이벽을 부를 때면 늘 앞에 ‘우인(友人)’ 또는 ‘망우(亡友)’란 말을 붙이곤 했다. 마음이 통하는 벗으로 여긴 것이다.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전재한 것이 분명한 『조선순교자비망기』의 기록에서 다블뤼 는 이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벽은 키가 8피트나 되고 한 손으로 100파운드를 들어 올릴 정도였다. 우람하고 잘생긴 외모는 몹시 위엄이 있어 보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재능 또한 외모에 뒤지지 않았다. 언변의 장중함은.. 2020. 7. 5.
8. 감추고 지운 다산의 기록 다산은 왜 천주교 관련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을까 다산의 자기 검열과 왜곡된 진실 「조선복음전래사」와 비전 묘지명 6편의 예를 통해 보았듯, 천주교에 관한 한 다산의 모든 기록은 문면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에 관한 언급만큼은 철저한 자기 검열을 거쳤다. 검열의 방법은 아예 입을 다물거나 말꼬리를 흐렸고, 그도 아니면 사실을 왜곡해 말 허리를 자르지 않으면, 다른 사실을 덧대 해당 사안이 묻히게 했다. 오석충(吳錫忠, 1742?~1806)은 다산이 「매장묘지명(梅丈墓誌銘)」에서 자기 입으로 자신과 가장 친하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매달 월급을 받으면 가난한 그를 위해 두 말 곡식을 보냈고, 장마철이나 한겨울에는 그가 사는 매동(梅洞)으로 나무 한 짐씩을 .. 2020. 7. 5.
7. 권철신과 주어사의 젊은이들 앞길 창창한 양반가 자제들, 천주학 공부에 동참하다 주어사 강학회 참석자들 1776년 5월 24일에 권철신은 홍유한에게 쓴 편지에서 이총억(李寵億, 1764~1822)과 이존창(李存昌, 1752~ 1801), 그리고 홍유한의 아들 홍낙질(洪樂質, 1754~1816) 등 십여 명의 젊은이가 공부에 동참했다고 썼다. 또 세 해 뒤인 1779년 주어사에서 열린 겨울 공부에는 김원성(金源星, 1758~1813), 권상학(權相學, 1761~?), 이총억,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참석했고, 뒤늦게 이벽(李檗, 1754~1785)이 합류했다. 두 모임에 모두 참석한 것은 이총억이다. 이존창과 권상학도 두 모임에 함께 참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김원성.. 2020. 6. 23.
6. 주어사 강학회의 공부 내용 1779년 겨울 언 샘물에 세수하고 서학을 공부하다 두 번 갖지 못할 성대한 자리 다산이 환갑을 맞아 지은 6편의 묘지명은 자신을 포함하여 천주교 문제로 죽은 이가환, 권철신, 이기양, 정약전, 오석충 등 여섯 사람이 사실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음을 밝히자고 쓴 글이다. 그랬던 것이 「조선천주교회사」에 인용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는 기술 내용이 자못 달라졌다. 그 달라진 부분을 겹쳐서 보면, 바뀐 다산의 생각과 다산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지점이 보인다. 이번 글은 이 점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권철신에 대해 쓴 「녹암묘지명(鹿菴墓誌銘)」을 보자. “선형(先兄) 정약전이 폐백을 들고 권철신 공을 스승으로 섬겼다. 예전 기해년(1779) 겨울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하였는데, 눈 속에 이벽이 .. 2020. 6. 23.
5.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 귀양 풀린 다산, 조선의 복음 전래에 관한 회상록 남기다 「조선천주교회사」 초기 기술의 근거가 된 책 이 책이 계속 궁금했다. 정말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란 제목의 책을 썼을까? 아니 쓸 수 있었을까? 사실 「조선복음전래사」는 원책의 제목이 아니라, 다블뤼(1818~1866) 신부가 「조선 순교자 비망기(Notes de Mgr. Daveluy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에서 초기 천주교회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을 정약용이 지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온 것에 관한 회상록(des mmoire sur l’introduction de l’Evangile en Core)」에서 인용했다고 말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조선복음전래사」는 이 불어 제목을 한국말로 번역한 것이고,.. 2020.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