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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12

4. 다산 정약용과 「칠극」 다산, 배교 선언 이후에도 「칠극」의 가르침 계속 되새겨 ▨ 「칠극」을 평생 아껴 읽은 다산 다산 정약용(요한 사도)의 자형 이승훈(베드로)이 동지사 부사로 간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1784년 봄에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의 수중에 방적아(龐迪我)의 「칠극(七克)」, 필방제(畢方濟)의 「영언여작(靈言勺)」, 탕약망(湯若望)의 「주제군징(主制群徵)」 등의 책이 들려있었다. 다산은 이를 큰 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요한 세례자)을 통해 구해 읽고 급격한 마음의 쏠림을 느꼈다. 여러 책 중 다산의 마음을 끈 것은 단연 「칠극」이었다. 「칠극」은 다산의 생애 전반을 함께한 책이었다. 강진 유배 이후에도 「칠극」의 그림자는 다산의 글 곳곳에서 얼비친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증언(贈言).. 2020. 6. 2.
3. 권철신의 남행 계획과 그들이 꿈꾼 공동체 성호학파, 서학의 사유 받아들이는 전위적 학술집단 꿈꾸다 1785년 홍유한의 부고를 듣고 권철신(암브로시오)이 지은 제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아! 한 구역의 땅에 터를 잡고 손을 잡고서 함께 돌아가는 것은 제가 예전부터 품었던 소원이었습니다. 또한, 동지 몇 사람이 십수 년 동안 꼼꼼히 얽어 준비한 계획은 마침내 일과 마음이 어긋나 중도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홀로 천리 밖 영남에서 공이 홀로 지내면서 한 사람도 따름이 없어, 살아서는 서로 힘이 되지 못했고, 죽어서도 서로 알지 못했으니 제가 공을 저버림이 크다 하겠습니다.(嗚呼! 擬卜一區, 携手同歸, 是小子夙昔之志願, 亦同志數人, 十數年綢繆謀畵者, 而畢竟事與心違, 中道解散. 獨僑公於千里嶺外, 而無一人相隨, 生不相將, 死不相知, 小子之負公大矣.)” .. 2020. 5. 24.
2. 권철신과 이기양이 지은 홍유한 제문의 행간 「칠극」의 가르침 오롯이 실천한 한국 가톨릭교회 첫 수덕자 농은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 30대 초반이던 1757년 천주교 교리서를 처음 접한 뒤 서학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특별히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은 「칠극(七克)」이었다. 스승 성호 이익의 인가도 있었지만, 진리를 담은 층층의 가르침이 내면에서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을 바탕으로 수계 생활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는 「직방외기」와 「천주실의」 같은 책도 구해서 읽었다. 「직방외기」 서문을 독특한 필치로 베껴 써둔 친필이 남아있다. 조선 천주교회는 1784년 초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옴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 2020. 5. 24.
1. 칠극(七克) 이야기 조선의 선비들, 봄비에 속옷 젖듯이 서학에 젖어들다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로 만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과 천주교 신앙 문제를 파고들어 지난해에 「파란」이란 책을 펴냈다. 당시, 공부를 위해 초기 교회사 자료를 살피는데, 눈길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뭔가 분명 앞뒤로 맥락이 있는데, 쉬 알기가 어려웠다. 모든 일에는 행간이 있다. 행간을 뺀 정보는 죽은 정보다. 행간이 정보에 그림자를 드리워야, 그 정보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중국 천주교회는 조선 교회의 놀라운 성장과 잔혹한 박해에도 꺾이지 않는 정신에 놀라, 「고려주증(高麗主證)」,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史略)」, 「상재상서(上宰相書)」 같은 한문 책자를 잇달아 펴내며 경이의 눈길을 보냈다. 신앙 선조들이 한문으로 쓴 각종 자료는 아직도 살펴야 .. 2020.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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