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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12

76. 김범우 토마스의 유배지 다블뤼 주교 “김범우 유배지는 충청도 동쪽 끝의 단양” 기록 ▲ 위 문서는 김범우의 손자 김동엽 가에 전해온 것으로, 김동엽이 근래에 밀양으로 유락해 들어왔고, 그가 그간 균청둔감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했음을 적고 있다. ▲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 김범우의 입교와 정약용 집안 김범우(金範禹, 1751 ~1786) 토마스는 1786년에 유배지인 충북 단양에서 죽었다. 111년 뒤인 1897년에 편찬된 「경주김씨 정유보(慶州金氏 丁酉譜)」에는 김범우가 1787년 7월 16일에 죽었다고 해서 사망연도에 차이가 난다. 하지만 동생 김이우와 이승훈은 그가 1786년에 죽었다고 했고, 다블뤼도 「조선순교사비망기」에서 “이 나라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단양의 아전들은 그가 2년 뒤, 다시 말해 1786년에 사망.. 2021. 12. 2.
75. 주문모 신부의 등대, 이보현과 황심 처남 매부 이보현과 황심, 주문모 신부 도와 조선 교회 명맥 이어 ▲ 포졸들이 배교를 거부한 이보현을 해미 장터로 끌고나가 죽도록 매질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 복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주문모 신부의 한양 탈출과 지방 잠행 1795년 4월 전주에서 윤유일과 최인길을 따라 상경했던 주문모 신부는 5월 한영익의 밀고로 큰 위기에 처했다가 강완숙의 집 뒤란 장작광에 숨어 7월까지 숨어 지냈다. 푹푹 찌는 삼복의 불볕더위를 지나 서늘한 가을 기운이 돋을 때까지 계속된 어두운 장작광 속의 도피 생활은 기도 밖에 아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절망적 시간이었다. 이후 전주로 보낸 편지에 응답이 올라오고 나서도, 신부를 추적하는 감시망이 계속 죄어오자 신부는 더 이상 서울에 숨어 지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180.. 2021. 11. 20.
74. 윤지헌과 주문모 신부 윤지헌, 주문모 신부의 비선 책임자이자 저구리 교회 지도자 ▲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북경에 보낸 청원서에 조선 신자 5인 대표로 이름을 얹었을 만큼 핵심 중의 핵심이었으며, 황심을 뽑아 보낸 당사자이기도 했다. 그림은 탁희성 화백의 ‘황심 토마스- 북경에 보낼 백서’. 주문모 신부와의 상시 채널 이존창은 저구리 깊은 산골에 주문모 신부를 모셔두고 이곳을 한국 교회의 총본부로 자리매김할 생각이었다. 신부가 한양에서 첫 미사를 올린 것은 음력으로 1795년 2월 16일이었고, 첫 지방 사목 방문 길에 오른 것이 4월이었다. 주 신부는 1월에 한양에 들어온 뒤 한 달 정도 준비 과정을 거쳐 주님 부활 대축일 첫 미사를 드렸고, 이후 한 달 반 남짓 사목 활동을 이어 가다가 지역 순방 길에 올랐던 셈이다... 2021. 11. 20.
73. 요사팟이란 세례명 성 요사팟 전기가 석가모니 생애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까닭은 ▲ 롱고바르디의 「성요사팟 시말술략」의 표지와 첫 면 사진. 싯다르타를 모델로 한 허구의 성인전 주문모 신부는 1799년 6월 김건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김건순은 두 사람이 처음 회동한 1797년 당시 신부가 자신에게 요사팟(Josaphat, 若撒法)이라는 사호(邪號)를 주었다고 진술했다. 세례 이전에 세례명부터 먼저 받았다는 얘긴데, 이는 애초부터 주문모 신부가 김건순에게 요사팟 성인의 삶을 겹쳐보고 있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사학징의」 중 조혜의(趙惠義)의 공초를 보면, “이른바 별호란 것은 일찍이 사학을 하다가 죽은 사람은 모두 이름이 있는데, 사학을 하는 자가 그 일이 자기에게 비슷하게 되기를 사모하여 그 이름을 취한다”고 했다. .. 2021. 10. 31.
72. 윤지헌 일가의 신앙생활 윤지충·윤지헌 집안 거의 멸문… 숙부 윤징 정사박해 때 순교 ▲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 「백가보(百家譜)」에 수록된 윤지충 일가 족보. 파란 색으로 표시된 세 사람의 이름 아래 모두 ‘사주(邪誅)’란 표현이 보인다. 숙부 윤징(尹)도 정사박해 순교자 「남보(南譜)」는 당시 남인 유력 가문의 족보를 모은 책이다. 해남 윤씨 항목에서 윤지충의 이름을 찾으면 윤두서(尹斗緖)의 아홉 아들 중 다섯째 윤덕렬(尹德烈)의 손자로 나온다. 윤덕렬의 아들 윤경(尹憬)에게 다시 두 아들이 있다. 맏이가 윤지충이고, 둘째가 다섯 살 터울의 윤지헌이었다. 다산의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 시집온 아내 윤씨는 윤지충의 여동생이자 윤지헌의 누나였다. 여러 종류의 「남보」에 윤지충과 윤지헌 두 사람의 이름 뒤에는 ‘사폐(邪斃).. 2021. 10. 24.
71. 윤지헌과 고산 저구리 교회 고산 저구리 교회 중심 윤지헌, 대역부도 능지처사형으로 순교 ▲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묘소에서 발견된 복자 윤지헌 프린치스코의 유골.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한 그의 유골은 경추 2번에 잘린 흔적이 있고, 양 팔꿈치 아래와 두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사라진 상태로 수습되었다.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참혹한 시신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는 형 윤지충의 그늘에 가려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1801년 9월 17일에 처형된 그의 유골은 2021년 3월 전주 바우배기의 묘소에서 양 팔꿈치 아래와 두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사라진 상태로 수습되었다. 2번 경추와 팔꿈치, 그리고 무릎에는 칼날에 절단된 자취가 남았다. 10년 전인 1791년 그의 형 윤지충과 사촌 .. 2021. 10. 17.
70. “이 무덤 위에 교회가 서리라” 순교자 유해 3위 교리당에 안치… 주문모 신부 예언 마침내 실현 ▲ 순교 복자 윤지충 바오로 묘에서 출토된 백자 사발 지석. 무덤에서 출토된 사발 2021년 3월 11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성역화 작업 도중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무덤과 유해가 발견되었다. 반 년간의 검증 과정을 거쳐 지난 9월 24일 전주교구의 공식 학술 보고회가 있었다. 출토된 유골에는 목과 팔 등에 난 칼자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에서는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직경 15㎝ 크기의 사발이 묘광의 중간 부분에서 수습되었다. 윤지충의 묘에서 나온 사발에는 “성균생원(成均生員) 윤공지묘(尹公之墓). 속명지충(俗名持忠), 성명보록(聖名保祿), 자우용(字禹庸), 기묘생(己卯生), 본해남(本海南)”.. 2021. 10. 9.
69. 김건순의 개종과 여주 교회 도가의 술법 익혔던 김건순의 사람들, 일제히 천주교로 전향 ▲ 김건순의 사람으로 도가의 술법을 익혔던 이중배와 원경도는 1800년 3월 여주 정종호의 집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이들은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해서 길가에 모여 큰 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삼종경을 외우고,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이들의 부활 축제는 온종일 노상에서 계속되었다. 그림=탁희성 화백 천당 가는 법을 얻었소 김건순의 추종자였던 정원상은 1797년 10월에, 8월 중순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했던 김건순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중배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았다. 당시 김건순의 집에는 이중배, 원경도와 서양화가 이희영과 그의 조카 이현, 김치석, 김이백, 김익행, 성명순 등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 2021. 10. 3.
68. 불멸과 개벽을 꿈꾼 사람들 미륵 세상 꿈꾸던 이들, 천주교의 차별없는 세상에 빠져들다 ▲ 초기 천주교 신자 중에는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도교 계통의 「정감록」 신앙에 빠졌던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다. 숙종조 이래로 조선을 강타했던 「정감록」 신앙은 거의 재림 예수 신앙의 조선 버전에 가깝다. 십승지를 찾고, 미륵 세상을 꿈꾸며, 도화낙원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은 그들이 원하던 바로 복음의 소리였다. 신선을 꿈꾸다 서학과 만나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정약종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일찍이 신선술을 배워 장생하려는 뜻이 있어, 그릇되이 천지가 개벽한다는 주장을 믿었다. 그러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천지가 바뀔 때는 신선 또한 소멸하여 없어짐을 면치 못할 테니 끝내 장생의 도리는 아니다. 족히 배울 것.. 2021. 9. 19.
67.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자 황사영 순교 이후 부인은 제주도, 두 살 아들은 추자도로 유배 ▲ 2018년 4월 15일, 우하하 성지순례단이 추자도 황경헌 묘소를 찾았을 때 묘소 위로 현현한 십자가 모양의 구름 형상. 횃불처럼 십자가를 손에 든 사람이 묘소를 굽어보는 신비한 형상이다. 사진=라용집 제공 뿔뿔이 흩어진 가족 1801년 11월 5일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2세 난 아들 황경한(黃景漢, 1800∼?)은 추자도로 각각 노비가 되어 떠났다. 숙부 황석필과 집안의 종들도 함경도 등지로 끌려가서 황사영의 아현동 식솔들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명련은 제주도 유배 길에 배가 추자도에 들렀을 때 두 살배기 어린 아들을 섬에 내려놓아야 했다. 이것으로 모자는.. 2021. 9. 19.
66. 황사영은 역적인가? 광적인 종교 탄압에 맞서 오로지 천주 섬기는 자유 청원 ▲ 황사영 백서.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에 달한다. 1㎝에 세 글자씩 쓴 1만 3384자 황심은 8월 23일 서울로 왔다가 이튿날 제천으로 떠났다. 그는 아마 8월 26일경에 배론에 도착했을 것이다. 황심의 제천행은 황사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간의 교회 소식을 전했다. 황사영은 자신이 그간 토굴 속에서 준비한 종이에 쓴 백서의 초고를 황심에게 보여주었다.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행차 편에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글이었다. 황심을 통해 신부의 최후에 대한 전언을 들은 황사영은 보완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황심이 말미를 두고 다시 오겠다며 길을 떠났다. 황사영은 내용을 추가해 초.. 2021. 9. 19.
65. 배론의 토굴 교우촌 토굴에서 기도와 강학·일기 쓰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 ▲ 야마구찌의 「조선서교사」에 수록된 1936년 8월 당시 배론 토굴의 입구 사진. ▲ 배론 토굴의 현재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배론 가는 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황사영이 2월 15일쯤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에 머물다가 강원도 접경으로 옮겼고, 이후 제천 배론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사학징의」 중 장덕유(張德裕)의 공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누각동에 사는 신자 김국빈(金國彬)이 3월 20일쯤 장덕유를 찾아왔는데, 자신이 2월 중순경 여주에서 김한빈과 우연히 만났더니, 그가 상복 입은 사람을 데리고 예천으로 내려간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또 배론 옹기점 주인 김귀동(金貴同)이 자신의 공초에서, 2월 그믐께 김한빈이 이상인(李喪..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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