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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2400

위선자의 무리, 바리사이파 사람들 '레몬을 가진 랍비', 마르크 샤갈(1887~1985), 1914년 작, 판지에 유채, 100*80cm, 노르트라인-베스트 팔렌 박물관, 뒤셀도르프.   마태 6,1∼6예수님은 당시 율법으로는 돌로 사형을 당하는 큰 죄인, 간음하다가 발각된 여인에게는 단 한 마디 꾸중도 않으셨다. 오히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자비로움을 보이셨다. 심지어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하신 너그러운 분이었다. 그런데 유독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만나면 흥분하시면서 욕설도 서슴지 않으셨다.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거룩하게 선별된 자들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 신심도 깊고, 하느님의 율법을 거슬러 죄도 짓.. 2006. 4. 24.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던 여인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두쵸(Duccio,1255~1319), 1308~1311, 대형제단화 부분, 템페라, 시에나대성당 박물관.   (마르 15,40∼41)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오랜 시간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던 예수님은 드디어 오후 세시 경에 큰소리를 내시고는 숨을 거두셨다.“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예수님의 죽음을 애타게 지켜봤던 군중들은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이 죽어가는 광경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마지막까지 기도를 하며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예수님의 운명은 철저히 버림받았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미 모두 스승의 곁을 떠났.. 2006. 4. 24.
성 토마스의 의심 “성 토마스의 의심”(부분), 1600-01년, 미켈란젤로 카라바죠(Michelangelo Caravaggio, 1571-1610), 캔버스에 유채, 107 x 146cm, 포츠담 쌍쑤씨 스티프팅 슐로서 개르텐, 독일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카라바죠의 작품으로, 암흑의 배경 중앙에서 강렬한 조명에 비추인 주인공을 마치 연극 연출하듯 표현하는 명암법, 즉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기법으로 그려내는 것이 그의 화풍의 특징이다. 부활하여 나타난 예수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직접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만져보는 성토마스의 모습이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2006. 4. 24.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 1515년,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70-1528), 이젠하임 제단화 중 좌측날개 부분, 목판에 유채, 269x142cm, 콜마르 운터린덴 미술관, 프랑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뤼네발트는 예수의 고통과 부활의 신비를 가장 참혹하면서도 신비롭게 표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활짝 열린 관 뚜껑 위에는 빛과 일치가 되어 얼굴의 이목구비 마저 잘 보이지 않는 예수가 당당히 서있고, 아래의 로마병사들은 그 빛에 눈부셔 나동그라져 있다.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이 제단화는 예수의 놀라운 부활의 기적을 환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06. 4. 24.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11-14년,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다폭제단화 중 중앙패널, 420 x 310cm, 목판에 유채, 안트웨르펜 노트르담 대성당, 벨기에 17세기 북유럽 바로크의 드라마틱한 분위기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 강렬한 빛을 받는 표현으로 극대화된다. 예수 뒤에는 붉은 모자를 쓴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이, 그 아래에는 푸른 옷의 성모가, 붉은 옷의 제자 요한 그리고 예수의 발을 부축하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십자가 위로부터 흐르는 흰 천에 휘감겨 땅으로 내려지는 예수의 몸과 이 화려한 화면에서 웅장한 색채의 장송곡이 울려퍼지는듯 하다.· 해설 : 박혜원 소피아 2006. 4. 24.
게세마니 동산의 예수 “게세마니 동산의 예수”, 1889년,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캔버스에 유채, 73x92cm, 웨스트 팜비치 놀톤 미술관, 플로리다 19세기 후반 ‘인위적이고 관습적인 모든 것에서 탈피’하여 열대섬 타히티에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한 프랑스 화가 고갱은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 그리고 과감한 화면 구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붉은색 머리의 예수는 그의 성스러움 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되었다. 그의 등 뒤로는 검은 나무 한 그루가 대담하게 화면을 반으로 가르고, 좌측의 강하게 휜 나뭇가지는 그를 배신한 유다와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2006. 4. 24.
예수와 함께 처형된 강도들 (루가 23, 39-43)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십자가 위에 뉘어 대못을 박았다. 잠시 후 대못이 예수의 손목과 발등 위로 박혀졌다. 순간 예수의 얼굴은 일그러지면서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 후 병사들은 여럿이 달려들어 예수가 달린 십자가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사형수인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에 못박아 예수 좌우 편에 한 사람씩 세워놓았다. 예수는 죽음을 앞둔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에 달려 조롱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기도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못박은 병사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유다교 지도자들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쳐다보고 조롱을 했다. “어이, 거기.. 2006. 4. 23.
하느님을 찬양한 백인대장 (루가 23, 44-49 참조) 예수는 십자가형 집행 장소인 해골산이란 뜻의 골고타 언덕에 도착했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백인 대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형을 집행하라." 백인대장(centurion)은 백 명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로마의 고급 장교이다. 총독 빌라도의 판결 명령을 받아 형을 실제로 집행하는 책임자는 백인 대장이었다. 백인 대장은 부하들에게 십자가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하고 모든 과정을 모두 상세히 기록해야 했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당시에 가장 극악한 범죄에 대한 로마 최고의 형벌이었다. 그런데 이 십자가형은 주로 하류계층에게만 적용되었고 상류계층은 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십자가형은 노예들에 대한 전형적인 처벌이었고, 정치적인 분쟁을 진압하기 위한 시범적.. 2006. 4. 23.
키레네 사람, 시몬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다', 지거 퀘더(1925~ ), 유화, 작가 소장, 독일.  마르 15,16-26참조빌라도 총독은 군중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예수를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예수를 총독관저로 끌고 가서 전 부대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서 예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웠다. 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몇몇의 병사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 하면서 조롱을 했다. 갈대로 머리를 치고 얼굴에 침을 뱉는 병사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도 마음 속에 깊이 숨겨둔 적개심을 예수께 쏟아 붓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예수의 옷을 다시 입혀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위해 밖으로 끌고 나왔다. 예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는 무표.. 2006. 4. 23.
용기있는 성녀, 데클라 '설교하는 바오로', 모자이크, 터키 이스탄불, 코라성당.  사도 바오로가 지금의 터키의 코냐(Konya) 지방인 이코니움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 이 고장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용감하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다른 지방처럼 여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오로 설교를 호감을 갖고 받아들였다. 그들 중의 한 여인이 특별히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인격에 매료되어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녀의 이름은 데클라였고 젊고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는 약혼한 몸이었다. 데클라는 3일 동안 밤낮을 창문에 앉아 바오로의 설교를 들었다."얘야, 정신 차려라. 무얼 좀 먹으려무나.. 2006. 4. 23.
비정한 여인 헤로디아 베네조 고졸리(1422~1497) '헤로데의 잔치', 유화, 22*34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소장. 자료제공=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정웅모 신부  마르 6,24-29 헤로디아는 분봉왕 필립보와 결혼하였다가 그와 헤어지고 나중에 시숙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이 잘못된 결혼에 대해 세례자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로데 왕에게 간곡히 진정하였다."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법도에 맞지 않습니다. 잘못된 점을 즉시 시정하여 주십시오.”헤로데는 왕인 자신에게 겁없이 여러 차례 간하는 세례자 요한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군중들의 여론이 두려워 쉽게 세례자 요한을 무작정 처형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세례자 요한을 감.. 2006. 4. 23.
베드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여종 두초(Duccio, 1255~1318)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1308~1311, 대형 제단화 부분, 템페라, 시에나 대성당 박물관.            자료제공=서울대교구 홍보실장 정웅모 신부   (마태오 27, 69-75 참조) 예수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험악하게 예수를 붙잡았다. 예수가 체포되는 과정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를 뒤따라갔다. 대사제 관저의 마당에는 종들이 불을 쬐며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드로는 살그머니 관저에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한밤중이라 주위는 어둠으로 깜깜했다. 예수께서는 안채에서 원로회의 심문을 받고 있었다.  “아니 이 밤중에 왜 이렇게 난리야? ” .. 2006.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