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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추기경 김수환

<그 후> 5- 종교간 대화, 젊은이들에게

by 세포네 201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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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 선생 묘소를 참배하는 김 추기경.
대화, 화합하려면 내가 먼저 양보해야

 

   2000년 5월 23일,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묘소에 참배했는데 이튿날 신문에 '가톨릭과 유교,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제목이 달린 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조상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유교 질서와 충돌해 피의 박해까지 겪은 천주교측 인사가 유교계 거목의 묘소에 찾아가 유교 예법으로 참배한 게 신선했던 모양이다.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을 수상한 데 대한 답례로 그날 묘소에 가서 술을 붓고 예를 올린 것인데, 어느 신문은 "가톨릭과 유교가 해묵은 역사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화해했다"고까지 표현했다.

 그런 긍정적 평가가 과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가톨릭과 유교, 두 종교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화합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니 다행이다.

 김창숙(1879~1962) 선생이 어떤 분인가. 일제 강점기 강직한 성품으로 유림을 단합해 항일운동을 이끌고,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쪽같은 일침을 가한 마지막 선비다. 격동의 근현대사에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꼿꼿한 선비로 살다 눈을 감으셨다.

 그처럼 훌륭하게 살다 가신 분에게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분의 종교가 유교건 불교건, 참배를 유교식으로 하건 불교식으로 하건 그런 것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종교인들은 우리 사회에 사랑과 화합의 모범이 돼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도 서러운데 국민들까지 지역ㆍ계층ㆍ세대로 갈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상황이라 그런 책무가 더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인들이 서로 만나 대화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대화나 일치에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때론 너무 옹졸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다. 대화는 고사하고 타 종교를 비방하고, 심지어 특정 교단 내부에서 심각한 다툼이 벌어져 거꾸로 사회에서 종교를 염려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단군상이나 성모상 훼손 사건만 해도 그렇다. 자기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법이다. 우상숭배 운운하며 특정 성화나 조형물을 훼손해 종교간 화합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꼭하고 싶다. 성화나 조형물은 숭배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점이다.

 상징물을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숭배지만, 상징물을 통해 그 대상을 기억하고 표양을 본받기 위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예의다. 종교 상징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표현수단으로는 형언할 길이 없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근원적 갈망의 발로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보자. 남의 종교 상징물을 훼손하는 사람의 얼굴 사진을 발로 밟으면 그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을 모욕했다면서 노발대발하겠지만 "인화지를 밟은 것이지 당신을 밟은 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면 대답이 궁색할 것이다.

 대화하고 화합하려면 자기 것을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조금의 불편과 희생도 감수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십자가 수난의 결과이고, 십자가 수난은 희생이 수반된 것인데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에 주저해서야 되겠는가.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의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사랑나눔을 위해 힘을 모으길 바란다.

 서강대에 들러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프로게이머 '쌈장' 이기석씨와 인터넷 화상통화를 한 적이 있다. 편지와 유선전화 세대이다 보니 컴퓨터 화면에 뜨는 상대방 얼굴을 보면서 말을 주고 받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난 젊은이들의 인터넷 문화를 잘 모른다. 은퇴하고 한동안 '혜화동 할아버지'란 이름으로 전자우편을 조금 이용해봤지만 그마저도 의사가 손목 관절염에 좋지 않다면서 금했다. 지금의 건강 상태와 집중력으로는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요즘 젊은이들이 휴대전화로 문자를 주고 받던데,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글자를 입력하는 것을 보면 신기(神技)에 가깝다(그들을 엄지족이라고 하던가?).

 컴퓨터와 인터넷이 편리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댓글이나 패러디 동영상으로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것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 한 인간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음란물이 떠다니는데도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자랑하는 게 마냥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음란물에 병들어가는 청소년 실태에 관한 신문 보도는 충격적이다.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청소년들을 병들게 한다면 그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독이다. '쌈장'과 화상통화를 한 뒤에 "컴퓨터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돼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터넷 윤리 또는 정보윤리 없는 IT 강국은 허상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예의와 윤리는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의 바다, 범죄의 바다가 될 수밖에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디지털 시대의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어른들이 혀만 끌끌 차고 있어서는 안 되고 앞에 나서서 가르쳐야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최고성능 자동차를 사서 운전기술만 가르쳐 거리로 내보내는 것과 같다. 운전을 할 때 교통법규를 숙지하고 있어야 인명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많은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한다. IT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 한 예다. 조선ㆍ반도체ㆍ 철강ㆍ자동차 등 산업 여러 부문에서도 우위를 보이고 있다. 스포츠 무대에서도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통쾌하게 보여준다. 지리적으로 아시아 변방의 작은나라에 살지만 강인하고 뛰어난 민족이다. 하느님은 이 민족에게 척박한 땅을 주신 대신 뛰어난 머리를 허락하셨다. 머리가 좋은 민족이다.


 그러나 참으로 뛰어난 민족이 되려면 도덕 및 윤리지수가 1위라야 한다. 세계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기 힘든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사람은 믿을 수 있다' '거짓말을 안 한다' '법을 잘 지킨다' '외국인 근로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산다'는 인정을 받아야 진정한 1등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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