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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신 김대건·최양업 전71

(11) 아시아 선교와 마카오 최초의 ‘조선 신학교’ 왜 마카오였을까 ▲ 포르투갈 왕정과 마카오 총독부는 선교 보호권을 내세워 교황청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을 많이 제약했다. 왼쪽 사진은 마카오 미니어쳐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19세기 중반 마카오 모습. 오른쪽은 마카오 루아 산토 안토니오 거리에 자리한 옛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현재는 5층 주상복합건물로 개조돼 있다. 한국가톨릭교회사의 대가였던 고 최석우 몬시뇰은 평소 신학자와 사학자들의 한국 교회사 서술에 있어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나는 김대건 신부의 역사 서술에 있어 세계 교회사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예로 1837년 마카오 민란으로 대표부의 신부들이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닐라로 피난했다는 대목을 제시했다. 최 몬시뇰.. 2021. 7. 4.
(10)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 선교사들, 선교지 조선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고 실제로 그랬다 ▲ 샤를르 쿠베르탕이 그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위앵(왼쪽부터)·볼리외·도리·브르트니애르 신부의 파견 예식 장면. 이들의 파견 예식은 조선을 향해 파리를 떠나던 1864년 7월15일경에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였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는 극동 무역의 전초기지일 뿐 아니라 유럽 선교사들의 극동 선교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모방 신부가 이들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낸 것은 이곳에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세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 시절을 살펴보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선교사에 관해 알아보기로.. 2021. 6. 27.
(9) 유학 길의 안내인 안내인은 무능하고 헤펐으며, 유학 길 경비만 1200여만 원 들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을 중국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안내한 이들은 조선대목구와 서만자 라자로회 공동 파발꾼으로 고용된 마리아노와 천 요아킴이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중국인 복사였던 왕 요셉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수품 허가서와 샤스탕 신부의 동의서를 가지고 북경에서 삭발례 등 소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 요셉과 마리아노, 천 요아킴은 서로 친분이 있었다. 왕 요셉 왕 요셉은 1832년 샤스탕 신부의 추천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길 안내인으로 고용됐다. 신학생 출신인 그는 병 때문에 페낭신학교를 그만두었지만, 페낭에 사는 중국인 신자들의 전교회장으로 추천될 만큼 열심한 .. 2021. 6. 10.
(8)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세 소년, 중국 내륙 길 걸어 6개월 만에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 샤스탕 신부를 만나다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은 1836년 12월 28일(또는 29일- 샤스탕 신부가 부모에게 쓴 편지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날짜를 28일, 29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 지대인 중국 변문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조선 선교사 샤스탕 신부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에서 선교하다 본국으로 귀환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길 안내인으로 함께 한 조선 신자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현석문 등 4명이 함께 했다. 세 신학생과 일행은 무슬림이 운영하는 제법 편한 숙소에서 보름여 간 쌓인 여독을 잠시나마 풀 수 있었다. 세 신학생과 신자들은 샤스탕 신부에게 모방 신부의 안부와 편지 등.. 2021. 6. 10.
(7) 세 신학생, 먼 길 떠나다 세 소년, 매서운 한파 대비해 목화솜옷 입고 유학길에 올라 신학생 서약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1836년 12월 2일 한양 후동의 모방 신부 사제관에서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 서약을 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다. 세 소년은 이 서약으로 더는 예비 신학생이 아니라 조선 교회의 엄연한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세 신학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라틴말로 서약했다. 서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나와 조선 선교지 교회 장상들에게 순종하고 순명하기로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나와 조선 선교지 장상들에게, 곧 교회 장상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다른 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또 장상이 정한 거주지를 이탈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까? 서약합니다.” 모방 신부는.. 2021. 6. 10.
(6) 모방 신부는 왜 그리 서둘렀나 박해 예감한 모방 신부, 하루라도 더 빨리 신학생 양성하려 해 왜 15세 신학생 후보인가 모방 신부는 왜 15세 세 소년을 조선의 신학생 후보로 선발했나? 아니, 평신도 지도자들은 왜 이들을 모방 신부에게 추천했나? 오늘날 중2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들에게 어떻게 이 무거움 짐을 지었을까? 유추하면, 조선 사회의 관례 풍습에 따라 평신도 지도자들이 세 소년을 성인(成人)으로 인정해 충분히 교회를 위해 자신들의 성소와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해 모방 신부에게 추천했을 것이다. 유교의 관혼상제가 뿌리내린 조선 사회에서 그리스도인 가정도 자녀가 15세가 되면 어른 대접을 해 아들의 머리에 상투를 틀고 관을 씌워주고, 딸의 머리에는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아 주었다. 이를 ‘관례’(冠禮)와 ‘계례’(禮)라 한.. 2021. 5. 23.
(5) 신학생 후보 추천한 조력자들<하> 평신도 지도자들, 세 신학생 후보의 신심과 총명함 알고 앞다퉈 천거 현석문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 후보로 추천한 이들이 단지 정하상, 남이관뿐이었을까? 사실 정하상, 남이관도 모방 신부와 함께 한 집에서 거주했기에 그 이름이 나왔다. 좀더 사고의 폭을 넓혀 당시 기록들의 행간을 읽어보자. 모방 신부는 한양 후동 집에서 정하상, 남이관뿐 아니라 이광렬, 권득인, 현석문 등 평신도 회장들과 함께 조선 교회 사목 방향을 논의했다. 이들 중 눈에 띄는 이가 바로 현석문(가롤로)이다. 현석문은 역관인 아버지 현계흠(플로로)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자 어머니와 누나 현경련(베네딕타)과 함께 강원도 김성(현 철원군 김화읍 일대)에 있는 교우촌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은 최.. 2021. 5. 23.
(4) 신학생 후보 추천한 조력자들 <상> 모방 신부의 신학생 선발 소문이 돌자마자 “후보자 여기 있습니다” 모방 신부는 1836년 1월 중ㆍ하순 조선에 입국해 한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6일 최양업을 시작으로 3월 14일 최방제, 7월 11일 김대건을 데려와 함께 기거하면서 신학생 후보로 양성했다. 모방 신부가 이렇게 신속하게 조선 신학생 후보들을 선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추천한 조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회에 걸쳐 모방 신부가 신학생 후보를 선발하는 데 힘을 보탠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본다. 모방 신부 조선 입국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첫 번째로 보낸 1836년 4월 4일 자 편지에서 “1월 12일 자정쯤 조선인 5명을 따라서 변문을 떠나 조선에 입국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 한양에 안착했는지 .. 2021. 5. 2.
(3) 충청도 출신의 세 신학생 신망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 자제 세 명을 조선 교회 사제로 키웁시다! ▲ 신유박해 이후 재건된 신앙공동체 가운데 중심 역할을 했던 교우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제준·최경환·최한지의 맏아들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사진은 1820년대에 형성된 은이 교우촌 조선 신학생 3명 최양업 신부 가족은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서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1827년에서 1830년 사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일구어 살던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해 얼마간 산다. 이후 최양업 신부는 홍주 다락골에서 서울로 이사했을 때처럼 더 나은 교리 공부와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부평에 정착한다. 이때가 1832년에서 1836년께이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 사학계에선 “최양업이 만 11세 되던 1.. 2021. 5. 2.
(2) 최양업 신부의 어린 시절 더 나은 신앙생활 위해 고향 떠나 서울로 상경한 최양업 일가 사진은 최양업 신부의 탄생지인 청양 새터 집터.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이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다래골, 다리골로도 불림)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홍주 감영(지금의 홍성군청)에서 20여㎞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791m의 오서산에 둘러싸여 형세가 마치 누각의 기둥 같아 ‘다락골’이라 불렀다. 박해자들의 근거지인 감영으로부터 걸어서 반나절 길에 있어 근황 파악에 쉽고, 앞은 틔어 있어 감시 또한 쉬우며, 주위가 험한 산이어서 피신하기 좋아 교우촌으로서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다. 다락골은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일군 교우촌이다. 다락골에는 경주 최씨들이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 2021. 4. 18.
(1) 김대건 신부의 출생과 어린 시절 솔뫼 출생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게 세례 받고 신학생 후보로 발탁 ▲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과 어머니 고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진은 솔뫼 성지내 김대건 신부 생가 복원터. 연재를 시작하며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한국 가톨릭교회는 올 한해 희년을 지내고 있다. 이 희년을 보다 뜻깊게 보내기 위해선 이들이 어떤 분인지를 우선으로 아는 게 중요하다. 성경을 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듯이, 2000년 역사를 조망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수 없듯이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알아야 이 분들의 진면모를 깨닫고 현양할 수 있다. 다행히 교회와 역사학자들의 학문 성과로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됐다... 202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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