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영성]/신 김대건·최양업 전71 (23) 남경조약 참관 이후 두 신학생이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잠시, 조선행 여정은 틀어지고 ▲ 신학생 김대건은 남경 보은사 9층 유리탑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편지에 남겼다. 그림은 요한네스 니호프가 그린 남경 보은사와 9층 유리탑. 남경조약 내용 남경조약은 제1차 아편전쟁에 패한 청에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제3자인 세실이 보기에도 조약 내용이 이렇게까지 일방적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남경조약 내용은 이랬다. 제1조 청국ㆍ영국 간의 평화와 우호를 약정하고 상대국 영토 내의 인명과 재산에 대한 충분한 안전 보장과 보호를 약정한다. 제2조 영국 신민(臣民)과 그 가족들이 아무런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상업에 종사하면서 거주할 수 있게 청의 다섯 개 도시(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를 개항한다. 동시에 이들 도시마다 영사.. 2021. 10. 9. (22) 1842년 남경조약 남경조약 ‘역사의 현장’에 통역관으로 참관한 김대건 ▲ 남경 조약 조인식. 세실 함장, 남경으로 떠나다 급보가 왔다. 영국과 청이 남경 정해사(靜海寺)에서 8월 12일부터 강화 협상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1842년 6월 26일부터 오송항에 정박한 에리곤호에 머물면서 제1차 아편전쟁 전황을 예의주시하던 세실 함장은 이 첩보를 듣고 촉이 왔다. 그는 즉시 부관 뒤프레 중위를 불러 중국말을 할 줄 아는 김대건과 함께 상해로 가서 중국 배 한 척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뒤프레 중위와 김대건은 중국 관리의 도움으로 꽤 큰 배 한 척을 구해왔다. 세실 함장은 뒤프레 부관과 김대건 그리고 해수로를 탐사할 지리학자와 병사 20명을 대동하고 중국 배로 남경을 향해 출발했다. 김대건이 “16일 동안 항해한 후 남경에 도착.. 2021. 10. 3. (21) 아편전쟁 서구 열강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중국을 담담히 지켜보다 ▲ 1842년 7월 21일 영국군이 파상공세로 진강을 함락했다. 항전한 청군은 가족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그림은 영국군이 진강 서쪽 문을 통해 상륙하고 있는 모습. ▲ 제1차 아편전쟁을 지휘한 영국의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 신학생 김대건과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는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를 타고 중국을 항해하면서 아편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김대건 일행이 주산도에 도착한 1842년 5월 11일부터 영국 함선 20척과 함께 양자강을 따라 오송(吳淞)에 도착한 뒤 8월 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4개월간은 제1차 아편전쟁이 가장 치열할 때였다. 영국군, 청나라 공격 영국의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는 25척의 군함과 14척의 철제 윤선(輪船),.. 2021. 9. 19. (20) 주산도 정해에서 오송으로 에리곤호가 머문 주산도 정해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주산열도에 2개월간 체류했다. 사진은 하늘에서 본 주산열도. 강화군 블로그 캡쳐 신학생 김대건과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가 탄 프랑스 군함 에리곤호는 대만을 지나쳐 1842년 5월 11일 중국 절강성 관문인 주산열도 정해(定海)항에 도착했다. 정해는 홍콩처럼 영국군이 1841년 10월 점령한 후 1842년 2월 10일부터 해군 기지를 자유무역항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정해항은 수심이 깊으면서도 조수 간만의 차가 별로 없고, 강풍이나 해일을 피하고자 육지로 둘러싸인 내해에 자리하고 있어 강풍이나 해일의 영향이 적어 해군 기지로서는 가장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춘 항구였다. 그래서 정해는 예로부터 해상 교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우리.. 2021. 9. 19. (19) 에리곤호, 대만 지나 정해로 마닐라 체류 중 조선어 문법서와 교리서 편찬에 정성 기울여 ▲ 오늘날 마닐라 라테라노 성 요한 대학.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이곳에서 2개월 간 머물며 조선어 공부와 교리서 편찬 작업을 했다. 마닐라에서 2개월간 체류 메스트르 신부는 1842년 4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마침내 에리곤호가 오늘 저녁에 돛을 펴고 출항한다는 소식을 신부님께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오늘 아침부터 배에 오르고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 편지 때문에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에리곤호를 타고 마닐라를 떠난 날짜를 1842년 4월 19일로 기록해 왔다. 김대건 신부의 연보와 가톨릭대사전, 심지어 김대건 신부 관련 연구 논문까지 그대로 인용됐다. 그런데 지난 8.. 2021. 9. 19. (18) 프랑스 함대 에리곤호 김대건, 조선으로 가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인으로 승선 ▲ 에리곤호와 같은 3등급 프랑스 프리깃함. 18세기 유럽에서는 한때 중국풍이 유행했다. 프랑스어로 ‘chinoiserie’(시누아즈리)라고 부른 중국 열풍은 유럽의 문화를 바꾸었다. 가정집은 중국풍 벽지로 도배됐고, 공원의 벤치와 탑, 정원이 중국풍으로 장식됐다. 이처럼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중국을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얼마 안 가 선박과 외교사절, 아편으로 중국을 야금야금 침탈했다. 또 영국이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자유 무역을 표방하며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조선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통상 교섭을 시도하자 프랑스도 뒤늦게 여기에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다. 조선인 통역사를 요구하다 1842년 2월 초.. 2021. 9. 19. (17) 조선에서의 사제 양성 앵베르 주교, 조선에서 직접 사제 양성하려 했으나 기해박해로 물거품 ▲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생활한 서울 후동의 정하상 집은 조선 교회 첫 주교관이자 신학교였다. 사진은 후동 입구인 오늘날 청계천 배오개다리 주변 모습. 이번 호에서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최양업ㆍ김대건과 별도로 조선 교회 안에서 신학생들을 선발해 사제로 양성하려 했던 계획을 살펴보기로 하자. ▲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1월 30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다음날인 12월 1일에는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지아코모 필리포 프란소니(Giacomo Filippo Fransoni)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앵베르 주교는 이 두 편지에서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보고했다... 2021. 9. 19. (16) 마카오로 귀환 마카오로 돌아와 공부 삼매경, 서양 세계에 대한 견문 넓혀나가 ▲ 파리외방전교회가 운영하던 중국신학교의 신학생들. 지구본을 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최양업·김대건도 조선신학교에서 세계지리와 지리학을 공부하면서 세계를 보는 눈을 떴다. 조선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은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의 소요를 피해 마닐라에서 약 7개월여간 생활한 후 칼르리ㆍ데플레슈ㆍ리브와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1839년 11월 중순 마카오로 돌아왔다. 이후 이들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1842년 2월 15일까지 약 2년여간 르그레즈와ㆍ리브와ㆍ메스트르ㆍ베르뇌 신부에게 교리와 철학, 신학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다시 마카오 조선신학교로 아편 무역 금지 조치로 영국과 청이 전쟁을 불사하는 가운데 183.. 2021. 8. 15. (15) 필리핀 피난살이 낯선 마닐라·롤롬보이 생활에도 교리 공부 게을리하지 않아 ▲ 필리핀 롤롬보이(Lolomboy)는 성 김대건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 시절 마카오에서 피신해 약 7개월간 머물렀던 곳이다. 두 조선인 신학생이 머물던 롤롬보이에 ‘성 김대건 신부 성지’가 조성 중이다. 사진은 롤롬보이 성 김대건 신부 성지의 전경으로 왼쪽 높은 건물이 피정의 집이고 오른쪽 조금 낮은 건물이 성당이다.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은 1839년 4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7개월여간 필리핀에서 생활했다. 그들은 스승인 칼르리ㆍ데플레슈ㆍ리브와 신부와 코친차이나 출신 신학생 3명과 함께 그해 4월 7일 마카오에서 출항해 13일간의 항해 끝에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마닐라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코친차이나 신학생 필.. 2021. 8. 8. (14) 또다른 시련 아편전쟁으로 마카오 정국 불안, 마닐라로 가서 8개월 피난살이 ▲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식민정부로 부터 언제 추방될지 모를 불안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림은 19세기 마카오 전경. 풍토병에 시달린 선교사와 신학생들 1837년 11월 27일 조선 신학생 가운데 맏형인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선종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박해자 다음으로 선교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질병 특히 풍토병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가운데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병사했고,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ㆍ장수ㆍ랑드르ㆍ조안노 신부도 조선 선교지에서 뇌염, 이질 등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선종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파견된 조선 .. 2021. 7. 22. (13) 동료를 잃는 아픔 풍토병에 걸린 맏형 최방제, 사제의 꿈 이루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 최방제가 1837년 11월 27일 마카오 극동대표부 조선신학교에서 선종했다. 조선 신학생의 맏형인 최방제의 사망 원인과 그의 무덤을 찾는 것은 한국 교회 사제 양성 역사를 정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사진은 마카오 가톨릭 신자 무덤인 성 미카엘 공동묘지로 현지 순례 안내인들이 이곳에 최방제가 묻혀 있다고 추정해 설명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1837년 11월 27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학생이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선종했다.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조선신학교 교장이며 스승인 칼르리 신부가 그의 임종을 지켜봤다. 최방제의 죽음은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둘은 맏형이면서 동기인 최방.. 2021. 7. 22. (12) 마카오 극동대표부 조선 신학교의 스승들 교장 신부부터 조선대목구장 주교까지 세 학생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쳐 ▲ 김대건과 최양업이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조선 신학교에서 스승 신부들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있다. 가톨릭평화방송 TV 특별 기획 드라마 ‘성 김대건’의 한 장면. 가톨릭평화신문 DB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조선 신학교 교수 신부들의 면면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조선 신학교 교장인 칼르리(Callery, 1810~1862) 신부는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1835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조선 입국이 쉽지 않아 마카오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이 마카오에 도착하자 조선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돼 교리와 교회 음악 등을 가르쳤다. 그는 1841년 11월 파리외방전교회를 탈회하고 프랑스로.. 2021. 7. 11.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