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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신 김대건·최양업 전71

(35) 김대건은 한양에서 무엇을 했나 ‘조선전도’ 만들고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작성 ▲ 김대건 부제는 1845년 한양에 도착해 소공동 돌우물골에 머물면서 다섯 가지 일을 처리했다. 지도는 김대건 부제가 제작한 ‘조선전도’ 원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100여 일 동안 한 일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4월 30일까지 머물렀다. 그럼 김 부제는 106일 동안 한양 소공동 돌우물골에 머물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머물면서 페레올 주교가 지시한 다섯 가지 일을 처리했다. 먼저,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데려올 배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선교사들의 입국을 도울 조선 지도를.. 2022. 1. 24.
(34) 김대건 부제, 돌우물골에 머물다 김대건 부제, 한양 중심지에 머물며 집 한 채 따로 마련 ▲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그해 4월 30일까지 소공동 돌우물골(石井洞)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에서 생활했다. 만 106일이라는 꽤 긴 시간을 김대건 부제는 이 집에 기거했다. 사진은 오늘날 환구단과 조선호텔 전경.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그해 4월 30일까지 소공동 돌우물골(石井洞) 남별궁(南別宮) 뒤편 우물가를 지나 두 번째 초가에서 생활했다. 만 106일이라는 꽤 긴 시간을 김대건 부제는 이 집에 기거했다. 1840년대에 김정호가 제작한 한성지도 「수선전도」는 남별궁 옆을 돌우물골로 표시하고 있다. 남별궁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 공주가 시집가서 살던 집으.. 2022. 1. 16.
(33) 김대건 부제, 조선으로 묵주기도에 의지, 강추위와 싸우며 국경 넘어 한양으로 ▲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봉황성 책문을 출발해 보름 뒤인 15일 한양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의주를 통과하는 데 3일, 의주에서 평양까지 5일, 평양에서 한양까지 7일을 여행했다. 사진은 분단 이후 길이 끊긴 의주대로 남측 최북단 임진강 화석정 전경. ▲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해 선교 자금으로 신자들이 미리 마련해 둔 남별궁 뒤편 돌우물골 집에 거처했다. 사진은 1910년대 경의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돈의문’ 전경이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일 봉황문 책문에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자신들을 데리러 온 김 프란치스코와 조선인 신자 2명을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이들로부터 자신의 조선 입국이 어렵.. 2022. 1. 10.
(32) 두 신학생의 부제 수품과 조선 입국의 난항 페레올 주교가 세 차례의 기회 차버리면서 조선 입국 계속 늦어져 ▲ 양관성당은 1838년 만주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될 당시 만주 전체를 사목하던 주교좌 성당이었다. 초대 교구장인 베롤 주교는 양관에 대성당을 신축하고 남만주 지역의 선교 중심으로 삼았다. 1843년 12월 31일 이 성당에서 조선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서품식이 거행됐다. 이 미사에는 최양업, 김대건 그리고 조선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도 참여했다. 사진은 문화혁명으로 파괴되기 전 양관 주교좌 성당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최양업ㆍ김대건 부제 되다 신학생 김대건은 1844년 2월부터 두 달간의 두만강을 통한 조선 입국 탐사를 마치고 그해 4월 페레올 주교와 메스트르 신부가 있는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요동반도 백가점.. 2022. 1. 10.
(31) 조선 입국 탐사와 김대건의 ‘훈춘 기행문’ 맹수 득실대는 산림 뚫고 왕복 1600㎞ 대장정, 두만강 국경 탐사 ▲ 해란강 전경. 중국에서는 이 강을 ‘토문하’라고 부른다. 백두산정계비에는 국경을 동으로는 토문으로 한다고 새겨져 있다. 구글 캡쳐 신학생 김대건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4년 2월 5일 2개월 여정으로 중국 만주 길림성 소팔가자에서 두만강 국경을 통한 조선 입국 탐사 길에 오른다. 그의 말대로라면 편도 2000리, 왕복 1600㎞의 대장정이었다. 김대건은 이 여행 보고서를 ‘훈춘 기행문’이란 제목으로 페레올 주교에게 제출했다. 훈춘 기행문(김대건의 아홉 번째 편지)은 김대건이 한문으로 쓴 유일한 글이다. 현존하는 김대건의 21통 편지 가운데 19통과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는 라틴어로 작성됐다. 김대건은.. 2021. 12. 26.
(30) 두만강 입국로 개척 페레올 주교의 안전주의에 조선 입국로 탐색만 하며 시간 흘러 ▲ 두만강 입국로 탐사를 주도한 조선 신자들은 이 길로는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것이 멀고 고통스럽다고 보고했다. 사진은 얼어붙은 두만강 풍경. 출처=다음 블로그 ‘김성련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신학생 김대건의 성직자 영입을 위한 압록강 입국 시도에 이어 두 번에 걸쳐 두만강을 통한 입국로 개척 과정을 살펴본다. 김대건은 신학생 시절 조선에 두 차례 입국했다. 첫 번째는 1842년 12월 2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왔다가 1843년 1월 1일 다시 중국 봉황성 책문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는 1844년 3월 8일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난 다음 소팔가자로 다시 갔다. 첫 번째 여행을 메스트르 신부가 주도했다면,.. 2021. 12. 17.
(29) 의주 땅을 밟고 돌아오다 검문검색과 살을 에는 추위 뚫고 홀로 국경을 넘나들어 ▲ 신학생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봉황성에서 조선 교회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홀로 중국과 조선의 국경 수비 상황을 파악하고자 의주 읍성까지 갔다가 1843년 1월 16일 메스트르 신부가 있는 중국 요동반도 백가점 교우촌으로 돌아왔다. 사진은 의주 변문 옛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부친과 최양업 부모의 순교 신학생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봉황성에서 약 8㎞ 떨어진 지점에서 우연히 조선의 동지사 일행과 마주쳤고, 그들 속에 있던 조선 교회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났다. 김대건은 그로부터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ㆍ샤스탕 신부와 신자 200여 명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친 김제준과 동기.. 2021. 12. 2.
(28) 가자! 조선으로 부모와 선교 사제들 순교 소식에 눈물 훔치며 결연히 길을 나서다 ▲ 신학생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께 압록강변 봉황산성 책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박해 소식을 듣는다. 왼쪽은 봉황산성 옛 모습(출처 바이두)이고, 오른쪽은 오늘날 새롭게 단장한 봉황산성. 브뤼니에르 신부, 지역민에게 피살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1842년 10월 23일 중국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에 도착한 후 수레를 타고 이틀을 간 후 25일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당도했다. 백가점은 바다에서 약 28㎞ 떨어진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200여 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 외지인 눈에 띄지 않지만, 왕래와 정보 수집, 피신하기 쉬운 지리적으로 전형적인 교우촌이었다. 이.. 2021. 12. 2.
(27) 페레올 신부 김대건·최양업에 앞서 중국 내륙의 입국로 개척한 파란 눈의 신부 1842년 10월 23일 최양업과 김대건, 메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중국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 백가점 교우촌에 도착했다. 여기서 최양업과 브뤼니에르 신부는 만주대목구장 베롤 주교가 있는 개주 양관 교우촌으로 갔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백가점에 머물면서 겨울이 오면 봉황성 책문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기로 했다. 이번 호에는 최양업과 김대건, 메스트르 신부보다 2년이나 앞서 조선 입국 길에 올랐던 페레올 신부(훗날 제3대 조선대목구장이 된다)에 관해 알아본다. 장 조제프 장 바티스트 페레올(Jean Joseph Jean Baptiste Ferreol, 1808~1853) 주교는 13년간 조선 교회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그중 조선 .. 2021. 11. 20.
(26) 조선 입국로 개척, 만주로 가다 만주행 여정 중 세관에게 붙잡힐 위기 가까스로 모면 ▲ 신학생 최양업·김대건이 중국 상해 장가루에서 베시 주교가 마련해준 배를 타고 요동 태장하까지 항해한 것은 교황 파견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첫 행보이다. 사진은 태장하 전경으로 청주교구 이태종 신부가 사목하는 차쿠성당 홈페이지에서 캡쳐했다.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와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 길 안내인 범 요한은 1842년 10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 산동대목구장이며 남경교구장 서리인 베시 주교가 마련해준 중국인 신자 배에 몰래 오른다. 상해 장가루에 정박해 있던 이 배는 돛이 5개가 달린 150톤급 배였다. 우리나라 해군 참수리 고속정이 150톤급이나 이들이 탄 배는 나무배였기에 아마 크기는 참수리호.. 2021. 11. 20.
(25) 1840년 전후 중국 교회 조선행 경비 지원 등 선교사들 도와준 중국 교회 주교들 이번 호부터 몇 회에 걸쳐 신학생 김대건과 최양업이 교황 파견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한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김대건ㆍ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때부터 프랑스 군함을 타고 중국 땅을 밟을 때까지가 제1장이라면, 지금부터 연재하는 두 조선인 신학생들의 조선 입국로 개척 활동은 연재물의 제2장에 해당한다. 시기로는 1842년 10월 남경교구장 서리 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요동으로 항해할 때부터 1844년 12월 최양업ㆍ김대건의 부제 서품식까지이다. 최양업ㆍ김대건의 조선 입국로 개척 활동을 본격적으로 연재하기에 앞서 이번 호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이 시기 중국 교회의 상황을 소개한다. 중국의 여러 교구와 대목구, 주교와.. 2021. 10. 31.
(24) 에리곤호를 떠나보내고 에리곤호에서 하선한 김대건 일행, 남경 거쳐 장가루에서 체류 ▲ 에리곤호에서 하선한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남경교구장 서리 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장가루에서 보름간 머물며 조선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이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상해 장가루성당.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버려진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 1842년 9월 11일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오송항 선착장에 서서 부두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에리곤호를 허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리곤호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둘은 자신의 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버려졌다’는 씁쓸함이 울컥 목구멍 위로 올라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9월 9일 오송으로 돌아와 에리곤호에 승선한 세실 함장은 장교들을 급히 소집했다. 그는..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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