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지도자들, 세 신학생 후보의 신심과 총명함 알고 앞다퉈 천거
현석문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 후보로 추천한 이들이 단지 정하상, 남이관뿐이었을까? 사실 정하상, 남이관도 모방 신부와 함께 한 집에서 거주했기에 그 이름이 나왔다. 좀더 사고의 폭을 넓혀 당시 기록들의 행간을 읽어보자. 모방 신부는 한양 후동 집에서 정하상, 남이관뿐 아니라 이광렬, 권득인, 현석문 등 평신도 회장들과 함께 조선 교회 사목 방향을 논의했다. 이들 중 눈에 띄는 이가 바로 현석문(가롤로)이다.
현석문은 역관인 아버지 현계흠(플로로)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자 어머니와 누나 현경련(베네딕타)과 함께 강원도 김성(현 철원군 김화읍 일대)에 있는 교우촌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그의 가족은 최양업 신부 일가와 이웃해 2년을 함께 살았다. 또 현석문은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가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하자, 최 신부의 동생들을 거두어 함께 살면서 자식처럼 보살폈다. 최 신부의 첫째 동생 최의정을 공주에서 결혼시킨 이도 바로 현석문이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100회차 최 베드로 증언 참조) 현석문은 최양업의 신심과 총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인물이다.
현석문은 또 1834년 중국인 유방제(여항덕 파치피코) 신부 입국 이후 해마다 가을이면 은이 교우촌을 찾아가 몇 달간 머물면서 신자들을 가르쳤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70회차, 오 바실리오 증언 참조) 이 시기에 현석문은 소년 김대건과 처음으로 대면했을 것이다.
현석문은 세 신학생 후보가 유학길에 오를 때 국경까지 배웅했고, 김대건 부제가 한양에 왔을 때 함께 생활하면서 그를 도왔다. 또 현석문은 김 부제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로 가서 그의 사제서품식에 참여했으며, 순교할 때까지 김대건 신부를 보필했다.
아마도 현석문이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신부와 함께 순교하지 않았다면 그는 최양업 신부를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도왔을 것이다.
이처럼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가족과 누구보다 각별한 사이였던 현석문이 신학생 후보 선발 소식을 들었을 때 망설임 없이 앞장서 최양업, 김대건을 추천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민극가
필자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인물이 또 한 명 있다. 바로 민극가(스테파노)이다. 민극가는 인천 출신으로 ‘갓등이’(현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교우촌 회장이었다. 갓등이는 최방제가 살던 남양 지역과 인접한 교우촌이다. 그는 갓등이에서 강원도 김성까지 자주 가서 최양업 신부 형제들에게 글과 교리를 가르쳤다. 당연히 민극가는 최양업 신부 가족뿐 아니라 현석문 가족과도 교분이 깊었을 것이다. 민극가는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부평으로 이주해 살 때도 찾아가 최양업의 집에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100회차 최 베드로 증언 참조) 최양업은 부평에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민극가는 또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양지 은이 교우촌에도 자주 방문했다.(「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시복 재판록」 70회차 오 바실리오 증언 참조) 따라서 그 역시 김대건의 됨됨이를 모를 리 없다.
민극가는 신자들로부터 꽤 신망받던 인물이다. 1837년 12월 말 조선에 입국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그의 됨됨이를 보고 교회 땅 관리를 맡길 정도였다. 앵베르 주교는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마련할 때에도 민극가에게 의지할 만큼 신뢰가 깊었다. 기록은 없지만, 민극가는 세 명의 조선 신학생 선발 과정에 어떻게든 관여했을 것이다.
명도회
여기서 되짚어볼 단체가 하나 있다. 바로 ‘명도회’(明道會)이다. 갑자기 왜 명도회를 꺼내나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명도회를 주목하는 것은 현석문과 그의 아내 김 데레사가 명도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명도회는 1797년께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교리교육과 선교를 목적으로 조직한 평신도 지도자 단체이다. 명도회는 회장과 하부 조직인 ‘6회’로 구성돼 있는데 초대 회장이 바로 정하상의 아버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다. 6회는 3~4명, 5~6명으로 구성된 6개 모임으로, 구성원 모두는 교회 핵심 인물들이었다.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평신도 지도자 대다수가 순교함으로써 침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27년 정해박해 때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명도회가 여전히 지속하며 회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또 현석문 부부가 명도회원이었다는 점은 적어도 명도회가 1849년 병오박해 때까지 유지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신태보(베드로)와 그의 사촌 이여진(요한),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요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이다. 또 이들 외에도 최경환, 김제준, 권득인(베드로), 현석문, 민극가 등이 평신도 지도자로서 신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기해와 병오년 순교자 80여 명 가운데 권득인 베드로,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최경환 프란치스코, 민극가 스테파노, 현석문 가롤로가 제 생각에는 제일 신덕이 굳세고 치명에 뛰어난 줄로 압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차 회기 이 베드로 증언 참조)
이들이 현석문처럼 명도회 회원은 아니었을까? 전국을 돌면서 신자들의 교리교육에 힘쓰고 전교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의 활동을 보면 명도회의 목적과 딱 들어맞는다.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인 방상근 박사는 “현석문이 살아 있었고 또 교회 재건에 지대한 공을 세운 유진길도 명도회원으로 추정되는 점, 그리고 1836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교회 재건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상황 등은 당시 명도회의 존재와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고 주장했다.(「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156쪽, 한국교회사연구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다음의 글로 명도회의 존재에 힘을 실어준다. “1836년 모방 신부가, 1837년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신자들이 있는 조선의 방방곡곡이 이렇게 하여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그들은 회장들을 임명하거나 승인하고, 어린이 대세와 혼인, 장례, 주일과 큰 축일의 집회,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 한마디로 가장 긴급한 모든 것에 관한 규칙을 정해 줌으로써 신자 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였다.”(2<中>권 385쪽)
그렇다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은 명도회 회장들이 넓게는 전국의 신자 가정에서, 좁게는 서울 경기 지역 신자 가정에서 신학생 후보로 뽑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고 가정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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