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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신 김대건·최양업 전71

(59) 조선 사회의 폐습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존엄 실천한 인권운동가 ▲ 최양업 신부는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에 기반한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했다. 사진은 CPBC가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의 한 장면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을 잘 보여준다.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과 인권 의식 최양업 신부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폐단과 폐습을 개선하려 헌신했다. 최 신부는 무엇보다 조선 교회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신분제를 혁신하려 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사회 약자를 우선으로 돕고 그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려고 행동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화와 학문, 기술을 받아들여 궁핍한 경제 환경과 비위생적 생활 환경을 개선하려 힘을 썼다. 최.. 2022. 8. 14.
(58) 다시 8개월간 조선 5도 돌며 신자 있는 곳이라면 험준한 산골·외인 마을도 마다치 않고 달려가 ▲ 최양업 신부는 조선 5도 127개 교우촌 신자 6000여 명을 담당해 사목했다. 그는 교우촌마다 꼬박 이틀을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고, 목숨을 걸고 성사를 기다리는 신자들이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녔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가 사목한 충청도 도앙골 교우촌. 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교회의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거의 혼자 조선 교회를 도맡아 사목해야 했다. 이미 밝혔듯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거동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직후 1850년 1월부터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전국 5도를 돌며 사목한 후, 장마 기간을 비켜 그해 10월부터 다음 해인 1851년 6월까지.. 2022. 8. 14.
(57) 사목자 최양업 사목에 뛰어든 최양업, 6개월간 3800여 명 만나 성사 베풀어 페레올 주교와 6년 만에 재회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중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신부를 찾아가 병자성사를 준 후 충청도 교우촌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찾아갔다. 아마도 페레올 주교가 1846년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 8명이 순교한 이후 병오박해를 피해 숨어지냈던 수리치골이었을 것이다. 둘의 만남은 1844년 중국 소팔가자에서 헤어진 후 6년 만의 상봉이었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ㆍ김대건 신학생에게 부제품을 준 후 김대건과 함께 조선 입국 길에 나섰기에 최양업과 헤어졌다. 둘은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풀어놓을 이야기보따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하루 동안 담소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도앙골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 2022. 7. 24.
(56) 조선 철종과 세계 정세 19세기 중반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해 일어날까 노심초사 ▲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던 1849년 강화 도령 이원범이 철종 임금으로 즉위했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철종을 둘러싼 안동 김씨 집안의 정치 파벌로 박해가 일어나지 않을까 예의주시했다. 철종 어진. 철종을 둘러싼 권력 다툼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당시 조선 교회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옛것과 새것이 충돌하는 격랑의 시기였다. 먼저, 조선은 1849년 헌종이 죽고,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농사짓고 나무베던 19세 ‘강화 도령’ 이원범이 임금으로 즉위했다. 바로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할아버지가 은언군 이인이다. 은언군은 장남 상계군 이담이 1786년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 2022. 7. 17.
(55) 입국해 바로 한양으로 드디어 조선 땅 밟은 최양업 신부, 성사 베풀고 사목 시작 ▲ 최양업은 압록강을 건너 입국해 바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때 귀국길을 도운 안내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셋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방제의 형 최형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 TV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양업 신부(왼쪽)와 안내자가 한양으로 향하는 모습. 귀국 길을 안내한 밀사 제3대 조선대목국장 페레올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홍콩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올해 초에 최 토마스 신부가 무사히 입국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다블뤼 신부도 최양업 신부가 1850년 1월께 입국해 자신에게 와서 병자성사를 주었다고 가족에게 전했다.(다블뤼 신부가 1850년 9월 부모에게 보낸 편지 참조)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페레올 주.. 2022. 7. 10.
(54) 요동 차구에서 스승 베르뇌 신부 도와 중국 신자에게 교리 가르치고 성사 베풀어 ▲ 눈의 성모 성당으로 불린 차구성당은 조선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고,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했다. 사진은 의화단에 의해 소실되기 전 차구성당의 모습. 차기진 박사 제공 주민들의 습격 받은 베르뇌 신부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9년 5월 프랑스 함선을 타고 백령도로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자신들을 마중 나온 신자들과 만나지 못하고 상해로 되돌아왔다. 둘은 조선에 있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무작정 상해에 머물 수 없어서 육로를 통한 조선 입국을 모색하기 위해 바로 프랑스 함선을 타고 요동 차구(溝)로 갔다. 차구에는 그해 만주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된 베르뇌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베르뇌.. 2022. 7. 3.
(53) 백령도 입국 시도 백령도 입국마저 실패하며 실의에 빠진 채 육로로 눈길 돌려 ▲ 최양업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선을 타고 백령도에 도착해 조선인 신자들을 만나 본토로 입국하려 있으나 해도상의 오류로 백령도를 찾지 못해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백령도에서 바라본 서해. 이승선 기자 ‘조선전도’ 없이 백령도로 항해 조선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대목구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그해 5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백령도로 떠났다. 두 사제가 백령도로 향한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보고에 따라 백령도 인근에 중국 산동 어선들이 자주 나타나기에 접선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김(.. 2022. 6. 26.
(52) 사제 수품 마침내 최 토마스 사제품 받아, 조선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상해 장가루성당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이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 중 최 부제가 사제품을 받는 장면. 가톨릭평화신문 DB 조선 입국 실패, 자책하는 최양업 귀국에 실패하고 영국 함선을 타고 상해로 되돌아온 최양업 부제는 무너져 내렸다. 혼자서라도 남아 자신을 데리러 올 신자 배에만 올라타면 조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선교사들과 그리운 가족,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손에 잡힐듯한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요동이나 홍콩으로 다시 가기보다 조선의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오는 지시를 따르기에 제일 적합한 장소라고 판단해 상해에 머물기로.. 2022. 6. 19.
(51) 신치도에서 조선 땅을 눈 앞에 두고 발길 돌려야 했기에 눈물을 삼키다 ▲ 최양업 부제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선을 타고 표착했던 신치도. 최양업 부제가 조국을 떠난지 11년 만에 밟은 고국땅인 이곳에서 1달간 숙영하며 육지로 입국할 방법을 모색하다 끝내 실패하고 만다. 영국 군함에 구조를 요청 글로와르호 함장 라 피에르 대령은 함대의 고군산도 좌초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나 미국 함선에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8월 25일 준사관 2명을 오늘날 구명정에 해당하는 종선(從船)에 태워 상해로 급파했다. 좌초한 뒤 군사 560명이 신치도에서 숙영한 지 13일 만의 결정이었다. 라 피에르 대령은 좌초된 2척의 함선을 조사하고 프랑스 군인들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신치도 숙영지에 온 고군산진 유진장 조경순을 비롯한 조선 .. 2022. 6. 12.
(50) 프랑스 군함 타고 프랑스 군함에 통역사로 승선한 최양업은 고군산도까지 갔지만 …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프랑스 함선 글로와르호를 타고 조선 고군산진 신치도에 상륙했다. 그림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승선했던 글로와르호. 출처=위키피디아 조선으로의 출항 최양업 부제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에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라틴어 번역 작업을 마친 후 조선으로 출항할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곧 1846년 8월 세실 제독은 프랑스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 앞 외연도로 가서 조선 정승 앞으로 한문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세실 제독의 편지에는 1839년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의 살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다음 해에 회신을 받으러.. 2022. 6. 5.
(49) 최양업은 홍콩에서 라틴어 능통했던 최양업,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시복의 숨은 공로자 ▲ 최양업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 행적은 이들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기초 자료가 됐다. 그림은 1925년 7월 5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걸린 복자화. 조선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에 기여 홍콩은 1841년 1월 영국에 점령된 후 청이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함으로써 1842년 남경조약에 따라 영국에 양도됐다. 이때부터 홍콩에는 영국과 미국, 독일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펼쳤다. 교황청도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축소하기 위해 1841년 4월 22일 지목구를 설정해 홍콩을 포르투갈령인 마카오에서 분리했다. 이후 비오 9세 교황(재위 1846~1878)은 1847년 .. 2022. 5. 28.
(48) 최양업의 눈물 김대건 순교 소식에 비탄에 빠진 최양업, 조선 입국마저 무산 ▲ 김대건은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사진은 가톨릭평화방송 TV 드라마 ‘성 김대건’ 중 김대건 신부의 처형 장면. 병오년, 박해의 피바람이 불다 김대건 신부가 붙잡히자 조정은 그를 도운 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1846년 5월부터 7월에 현석문(가롤로)와 김임이(데레사), 이간난(아가타), 우술임(수산나), 정철염(가타리나), 임치백(요셉), 남경문(베드로), 한이형(라우렌시오) 등 약 30명이 체포됐다. 이들 중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현석문이 3일 뒤인 9월 19일 새남터에서 참수 순교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0일 김임이, 이간난, 우술임, 정철염,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은 옥에서 교수형으로 .. 202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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