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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12

[그때 그 순간 40선] 4. 정미(1787년) 반회(泮會) 사건 구베아 주교, 모든 성사 거행 중단과 조상 제사 금지 지시 「송담유록」에서 1787년 정미반회 사건을 다룬 대목 1787년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 연구하다 발각 평신도 성직제도가 한참 비밀리에 실천되고 있을 때, 한양의 성균관 근처 김석태의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가 유생 동료들에게 들킨 사건이 있었다. 이를 1787년 김석태의 집이 있던 반촌(泮村)에서 모임을 했다고 하여, 반회(泮會) 사건이라고 부른다. 1787년 겨울,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여문(儷文: 4,6구로 이루어지는 변려문)을 짓는다는 핑계로 김석태의 집에서 모여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고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설법(說法: 강론이나 설교를 가리키는 말을 당시에는 불교의 설법으로 표현함)을 하였다. 유생 동료였던 이기경이 그들의 여문을 보니.. 2024. 1. 22.
[그때 그 순간 40선] 3. 평신도들로만 이뤄진 성직제도 지역별로 평신도 성직제도 운영, 미사 집전하고 성사 거행 한국 천주교회 초기 미사를 인형으로 재현한 모습. 서울대교구 가회동성당에서 전시 중이다. 출처=서울 가회동본당 홈페이지 주교 역할 이승훈, 미사집전자 10명 선발 김범우의 명례방 공동체에서의 집회는 최소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강론이 이루어지는 말씀의 전례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인다. 이벽이 “설법(說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강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을사추조 적발사건(1785년)이 있었던 후, 이 집회는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은 말씀의 전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성사(聖事)의 거행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를 실행하는 데 주도했던 이승훈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 2024. 1. 14.
[그때 그 순간 40선] 2. 을사추조 적발사건 명례방 집회 적발, 조선 사회에서 공적으로 드러난 첫 장면 한국 교회 설립 초기 신자들은 명례방(지금의 서울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그림은 ‘명례방 집회’.(김태 작, 1984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 열고 전례 거행 선교사의 입국과 전교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책을 통해서 성교회의 도리를 찾고 실천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독특한 특징이며,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의 시작에는 평신도 교우들의 활동과 문서 전교의 힘이 돋보였다. 이처럼 양반과 중인 중심으로 모인 한국의 초기 교회 공동체는 이벽의 집에서의 세례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좀더 큰 집으로 곧 명례방(明禮坊) 김범우의 집으로 그 집회 장소가 옮겨졌다. 오늘날 장악원(掌樂院) 표석이 있는 곳 앞쪽에.. 2024. 1. 7.
[그때 그 순간 40선] (1)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왜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설립으로 보는가 탁희성(1915~1992) 화백이 그린 ‘이승훈, 북경에 가다’(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이승훈이 1783년 10월 동지사 편에 청나라 북경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승훈은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첫 영세자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 240주년을 맞이했다. 2024년은 갑진(甲辰)년 ‘푸른 용띠’의 해다. ‘청룡(靑龍)’의 해, 청룡열차 타고 2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784년도 갑진년이었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기도서와 교리서 및 천주교 예식과 관련된 여러 서적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벽(李檗)은 이.. 2024. 1. 1.
<96·끝> 「눌암기략」과 「송담유록」 객관적 정보 위주로 기술, 누락된 초기 교회사 보완할 귀한 자료 ▲ 이재기의 「눌암기략」과 강세정의 「송담유록」(연세대 도서관 소장) 표지. 오른쪽 본문 사진은 「눌암기략」 중 이존창·홍낙민 관련 대목이다. 신서파와 공서파의 중간 기록 신서파와 공서파의 첨예한 공방 속에 남인 내부의 입장도 갈렸다. 기록은 공서파의 것만 남았다. 신서파의 기록은 제대로 남은 것이 거의 없고, 남았더라도 자기 검열을 거쳐 오염된 자료가 많다. 공서파의 기록은 이기경의 「벽위편」이 가장 중요하다. 역시 이기경이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사학징의」도 중요하다. 이밖에 중간에서 어느 한쪽에 얼마간 기운 기록들이 존재한다. 강세정의 「송담유록」과 이재기의 「눌암기략」은 일반에게는 물론 학계에 낯선 책이다. 그간의 연재에서 두 책의 .. 2022. 4. 24.
95. 「고려주증」과 「고려치명사략」 조선 교회의 굳건한 신앙 본받으려 중국에서 펴낸 조선 순교사 ▲ 「고려주증」은 지금부터 143년 전에, 「고려치명사략」은 122년 전에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된 조선교회 순교사이다. 이 두 책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바탕을 두었으나, 중국의 전통적 역사 편찬 방식을 도입해서 「고려주증」은 열전체로, 「고려치명사략」은 강목체로 새롭게 편집했다. 조선 천주교인 전기집 「고려주증」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GLISE DE CORE)」 2책은 1874년 파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이 파리외방선교회 출신 신부를 통해 중국에 들어오자, 프랑스 신부들은 이 놀라운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중국 교인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된 지 불과 5년 만에 한문으로 편집하.. 2022. 4. 17.
94. 「니벽젼」와 이벽의 사세시 불순한 자료로 인해 이벽 성조의 고결한 신앙 흐려질 수 있다 ▲ 숭실대 박물관 소장 「니벽젼」의 표지와 본문 끝부분 두 면. 「성교요지」를 언급했고, 마지막 면에는 이벽의 ‘사세시’를 수록했다. 가짜 책 「성교요지」의 진실성을 높이려고 만든 가짜다. 계열화된 위서의 계보 엄정해야 할 역사 기술에서 연구 대상에 대한 과도한 애정은 독이 될 때가 많다. 그 자체로 의미 있고 훌륭한 존재가 중간에 불쑥 돌출한 근거 없는 자료에 의해 오염되어 과장, 왜곡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모두 연구 대상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투사한 결과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만천유고」와 「성교요지」, 「유한당언행실록」 및 영세명부로 알려진 「망장(忘葬)」 등 14종의 천주교 관련 자료들은 예외 없이 1920년대 이후 한 집.. 2022. 4. 10.
93. 「성교요지」와 「상자쌍천(常字雙千)」 “마틴 목사의 책 베낀 「성교요지」는 이벽의 저작일 수 없다” ▲ 윌리엄 마틴 목사의 「상자쌍천」 원본의 원문과 영문 번역 부분, 그리고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피득 후서’로 표기한 부분과 숭실대본 「성교요지」의 같은 대목을 비교하였다. 「상자쌍천」은 한자 습득을 위한 교재여서 매 낱글자에 대한 분석과 발음이 적혀있다. 서양 명사 및 인물 지명 표기에서 잡힌 발목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벽(李檗, 1754~ 1785)의 저술로 알려져 왔다. 초기 교회사의 어떤 기록에도 없던 이 책은 1967년 김양선 목사가 공개한 「만천유고」 속에 섞인 필사본으로 처음 알려졌다. 이벽이 세상을 뜬 지 무려 182년 뒤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본대로 「성교요지」가 수록된 「만천유고」는 이 책 저 책을 베.. 2022. 4. 3.
92. 가짜 책 「만천유고」 이승훈이 직접 쓴 글 하나 없는 「만천유고」는 엉터리 ▲ 「만천시고」 중 홍석기의 「만주유집」과 양헌수의 「하거집」에서 베껴온 부분을 표시한 내용.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이 한 면에서만 본문에 표시한 것처럼 5자의 오자를 냈다. 옮겨 쓴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만천 이승훈과 「만천유고」 만천(蔓川)은 한국 교회 첫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호다. 만천은 무악재에서 발원해 독립문과 염초교를 지나 서소문 성지를 거쳐 청파동 남쪽으로 흐르던 샛강의 이름이다. 덩굴풀이 많이 자라 덩굴내로도 불렸다. 이승훈의 집이 만천 인근에 있었으므로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만천유고(蔓川遺稿)」는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된 이승훈의 문집이다. 「만천유고」는 1967년 8월 27일 자 「가톨.. 2022. 3. 27.
91. 알 수 없는 이존창 수차례 배교한 이존창, 마지막 선택은 순교였다 ▲ 이존창 루도비코는 조선에 있어서의 복음전파에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인물이었지만 감옥에 잡혀갈 때마다 배교를 맹세해 석방을 거듭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림은 형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이존창이 가족들을 데리고 한겨울에 고향을 떠나고 있는 장면. 그림=탁희성 화백 초기 교회사의 특별하고 특이한 존재 이존창의 존재는 초기 교회사에서 특별하고 특이하다.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며 충청도 교회를 견인했던 거물이었다. 「송담유록」을 보면, 선대의 신분이 노비였으나 면천되었고, 뛰어난 두뇌로 권철신의 강학에 참여하여 당당히 인정받았다. 1787년 그가 신앙 활동 중에 체포되자 이기양의 아우 이기성이 천안까지 찾아와 감옥에 갇힌 그에게 큰절을 올.. 2022. 3. 20.
90. 폐궁의 여인들 신앙에 목말랐던 폐궁의 여인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 받아 ▲ 사학징의 중 이조이의 공초기록 부분. 고인 물속에 전해진 복음 신유박해 순교자 중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 1754~1801)의 처 송 마리아(1753~1801)와 며느리 신 마리아(1769~1801)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이었던 이인은 강화로 귀양 가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고, 신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담(李湛, 1769~1786)은 홍국영의 모의에 연루되어 1786년 11월에 이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국왕의 친동생으로 산다는 것은 차라리 잔혹한 형벌에 가까웠다. 국왕 정조는 하나 남은 동생의 목숨을 지켜주려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은.. 2022. 3. 13.
89. 거룩한 해에 오는 1000척의 배 「정감록」 예언과 ‘대박청래’ 접속, 천주의 세상을 꿈꾸다 ▲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 「정감록」의 첫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다 1787년 4월 13일, 정약용이 아버지 정재원을 모시고 고향 초천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지금 팔당대교 인근의 물가 마을 당정촌(唐汀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팔당협을 오를 참이었다. 갑작스레 흉흉한 와언(訛言)이 돌아 마을이 온통 난리였다. 시는 「파당행(巴塘行)」이다. 전쟁이 났다는 소문에 아전이 들이닥쳐 군대를 점고했고, 흉흉해진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피난 길에 올라 우왕좌왕하는 정황을 잘 보여준다. 시 중에 “군대 왔다 말하지만 군대는 뵈지 않고, 바람맞은 나비 모양 정처 없이 가는구나”란 구절에 유독 눈길이 간다. 실제 「정조실록」 1787..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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