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36 [그때 그 순간 40선] 29. 조불수호조약과 종교자유를 향하여 전교 자유 얻지 못했지만 수단 입고 조선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 조불수호통상조약문 필사. 가톨릭평화신문 DB 1876년 일본에 이어 유럽 국가와 조약 맺어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과 정식으로 교류하며 개항을 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맺어질 때부터다. ‘강화도 조약’이라고 불리는 통상조약이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조약이었다. 조약을 맺는 대신(大臣)조차도 이미 일본과 수백 년 통상(通商)하고 있는데, 도대체 ‘조약’이라는 것을 왜 맺느냐고 물을 정도로 조선은 외교면에서는 너무나 무지했다. 조선보다 좀 더 빨리 개항했던 일본은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의 방식 그대로 조선과 외교조약을 맺었다. 치외법권을 적용한 점, 조선 해안을 일본 항해사들이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게 한 조항들이 그러한 부.. 2024. 7. 21. [그때 그 순간 40선] 28. 신앙자유의 여명을 향하여 조선 교회, 1886년 한불조약과 함께 신앙의 자유 여명기로 나아가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과 김보록(로베르) 신부.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1876년 선교사 들어오며 무너진 교회 재건 1876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들어와 무너진 교우촌을 방문하여 교회 재건을 시작하였다. 블랑 신부는 한강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를 위해 집을 한 채 마련하였다. 사대문 안 공소 회장에 참봉 조 베드로를, 문밖 공소 회장에는 김 프란치스코를 임명하여 공소와 교우촌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고를 통해 도성 안에 열심한 신자 42명·냉담자 62명, 도성 밖에 92명의 신자·82명의 냉담자가 있었고 25명의 예비신자가 준비 중이며 이들의 삶이 매우 비참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77년 리델 주교와.. 2024. 7. 14. [그때 그 순간 40선] 27.병인박해 이후 교회 재건의 노력 리델 주교, 조선어 문법책과 「한불자전」 편찬하며 조선 선교 준비 리델 주교 사진.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병인박해로 다시 성직자 부재 시기 맞아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긴 시간 동안 이어진 병인박해로 조선은 다시 성직자 부재 시기를 맞았다. 1866년 9명이 순교하고, 3명이 탈출한 이후 다시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꼭 10년 후인 1876년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에 조선 선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으로 탈출했던 리델·칼레 신부는 상해에 머물렀는데, 칼레 신부는 병인박해 보고서와 함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하였다. 후에 조선대목구장이 되는 리델 신부는 병인양요 이후 상해에서 조선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조선어 문법책과 「한불자전」 편찬을 시작하였다. 1867년 조선 .. 2024. 7. 7. [그때 그 순간 40선] 26. 병인박해 순교자 갈매못의 다섯 성인 “성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 다블뤼 주교 등 5명 갈매못에서 순교 다블뤼 주교를 포함해 5명은 갈매못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대전교구 갈매못 순교성지에 설치된 다섯 성인상 앞에서 수도자와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2명 중 9명 체포돼 1866년 봄에 시작된 병인박해로 당시 12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중 9명이 체포되고, 3명이 중국으로 피신했다. 숨어 있던 선교사들이 매우 빨리 체포되고 속전속결로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조선 정부가 이미 천주교의 조직과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집주인 홍봉주의 집을 수색하면서 시작된 박해는 2월 23일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데 이어, 3월 초까지.. 2024. 6. 30. [그때 그 순간 40선] 25. 병인박해(1866년)의 발발 1866~1873년 이어진 전국 박해로 선교사 등 8000여 명 순교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전경 종교의 자유 허락 약속했던 흥선대원군 병인박해는 고종 3년(1866)에 일어났다. 이 시기는 세도정치(순조·헌종·철종)의 끝 무렵으로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시대였다. 먼저 기존 연구를 토대로 박해의 원인을 되짚어 보자. 1864년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할 때, 그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조 대비로부터 섭정권, 곧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에는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으로 북경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외세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일부 관리들은 갑작스러운 변란에 대비해 천주교 성물.. 2024. 6. 23. [그때 그 순간 40선] 24. 베르뇌 주교의 활동과 업적 조선 교회 첫 시노드 개최하고 사목·신심 활동 체계화에 힘써 윤영선 작 ‘성 베르뇌 시메온’ 1854년 제4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 베르뇌(Berneux, Siméon François, 張敬一, 1814~1866) 주교와 조선의 첫 번째 만남은 마카오 대표부에서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쳤을 때였다. 베르뇌 주교의 편지에는 “통킹말 공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건강은 지금 아주 좋으므로 부지런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명의 조선인 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1840.10.27. 편지)라고 쓰여 있다. 베르뇌 신부는 1841년 통킹(베트남 북쪽) 지역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약 3개월 만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2년 동안 위에(Hué) 감옥에 갇혀 있었다. 언제 사형이 집행될.. 2024. 6. 16. [그때 그 순간 40선] 23. 최양업 신부의 업적과 찾아가는 선교 첩첩산중 교우촌 찾아다니며 발로 뛰는 사목하다 길 위에서 선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초상화 12년 동안 ‘발로 뛰는 사목·찾아가는 선교’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교활동은 한마디로 ‘발로 뛰는 사목·찾아가는 선교’라 말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엔 모든 선교사가 교우촌 혹은 공소를 순회하면서 이른바 ‘순회 선교’를 했는데, 특히 최양업 신부는 서양 선교사들이 찾아가기 힘든 험하고 깊은 산골짜기의 교우촌을 주로 담당하였다. 1850년 1월부터 1861년 6월까지 그는 주로 충청도를 비롯하여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 등 5개 도를 중심으로 순회하였고, 강원도 일부의 교우촌까지 순방하였다. 그는 1850년 1월 전라도 지역부터 시작된 사목 방문으로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5개.. 2024. 6. 9. [그때 그 순간 40선] 22. 페레올 주교 선종과 최양업 신부 활동 최양업 신부, 박해시기 통틀어 교우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 사목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초상화 조선 교회 위해 헌신한 페레올 주교 선종 병오(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할 때, 페레올(高, Ferréol, 1808~1853)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수리치골 교우촌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해-병오박해 82위 순교자 행적을 프랑스어로 정리해 극동대표부로 보내는 한편, ‘성모성심회’를 설립해 성모님께 의탁하며 조선 교회의 복음화를 위한 성무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성모성심회’는 프랑스 데쥬네트(Desgenettes) 신부가 1836년 창설한 신심회로, 성모를 공경하고 성모의 전구로 죄인의 회개를 청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신심회를 알고 있었던 페레올 주교는 1841년 ‘원.. 2024. 6. 2. [그때 그 순간 40선] 21.김대건의 순교와 병오박해 수선탁덕(首先鐸德) 김대건 신부, ‘사교의 괴수’ 죄목으로 새남터에서 순교 새남터 성지에 설치된 대형 유리화 ‘김대건 신부님의 축복’.가톨릭평화신문 DB 선교사 영입 바닷길 살피다 순위도에서 체포 병오박해는 헌종(憲宗) 12년, 1846(병오)년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지엽적인 박해를 가리킨다. 당시 한국에 입국해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다블뤼·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쓰는 한편, 조선 입국 기회를 살피며 만주(滿洲)에 머물러 있던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다. 주교는 육로를 통한 입국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해(西海)에서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을 찾아보게 하도록 김대건 신부를.. 2024. 5. 27. [그때 그 순간 40선] 20.한국인 첫 사제의 탄생 뒤늦게 합류한 김대건 신학생, 가장 먼저 사제품 받고 조선 입국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화 (윤영선 작). 가톨릭평화신문 DB 유학 초기 성장통 겪은 김대건 신학생 마카오 유학시절 초기에 김대건 신학생은 스승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최양업) 토마스는 계속해서 유리한 상태에 있고 천주님께서 그의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조선 포교지를 위해서 유익한 몸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위병과 요통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아도 심각한 두통을 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그의 머리털은 회색이고 희고 누르스름한 색 등 온갖 색깔이 섞여 있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렇게 추한 머리털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뿐더러 그는 판.. 2024. 5. 19. [그때 그 순간 40선] 19. 한국인 사제 양성의 시작 모방 신부, 1836년 소년 3명 뽑아 마카오 신학교로 유학 보내 세 신학생의 마카오까지 여정 현지인 사제 양성 위해 신학생 선발 정하상(바오로)의 순교로 국내에서의 한국인 사제 양성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방 신부는 이미 1836년에 한양에 거처하면서 3명의 소년을 뽑아 라틴어 기초교육을 하고, 한겨울에 육로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는 모방 신부의 모습이 그의 편지에 전해진다. “⋯나는 도착 후 즉시 유(파치피코) 신부에게 그가 말한 2명의 학생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나는 홀아비로 더없이 게으르고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신부가 될 수 없다.. 2024. 5. 12. [그때 그 순간 40선] 18. 정하상 바오로와 상재상서(上宰相書) 성 정하상, 조선 땅에 선교사 데려오고 대목구 설정에 공헌 박득순 작 ‘성 정하상 바오로’. 수원가톨릭대 소장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을 연재하면서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103위 성인 가운데 평신도 대표인 성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이다. 아버지 정약종을 잃고 청년 시절 온 생애를 다해 선교사를 영입하고자 북경 파발꾼으로 가서 선교사들을 모셔 들이고, 마침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자 사제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그의 노력은 우리 교회사에서 빠질 수 없다. 1839년 박해를 마무리하면서 정하상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한다.사제의 길을 미리 걸었던 신학생 정하상 정하상이 103위 성인의 평신도 대표인 것은 많은 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첫 신학생’으.. 2024. 5. 5. 이전 1 2 3 4 5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