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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한국교회사112

88.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 구조와 구성원 제대 꾸며진 협방에 주문모 신부 모시고 여성 20여 명 상주 ▲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그린 ‘도성대지도’. 종로구 안국동 인근 충훈부 후동에 강완숙의 집이 있었다. 현재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인근, 인사동 입구에 있었다. 오른쪽의 숲은 창덕궁과 비원이다. 좌측 상단에 정광수의 집이 있던 벽동이 보인다. 스무 명이 넘는 상주 인원 강완숙(골룸바)은 1799년 남대문 밖 창동에서 도심 속 대사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 새집을 지으려다 법적인 분쟁이 발생해, 1800년 3월에 충훈부 후동(관훈동)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다.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은 명실공히 조선 천주교회의 최전선이었다. 집행부의 중요한 의사 결정뿐 아니라 첨례와 교리 교육도 이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당시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2022. 2. 26.
87. 여걸 강완숙 골룸바의 카리스마 「사학징의」에 강완숙 이름 128회 등장… 6년간 주문모 신부 모신 여장부 ▲ 복자 강완숙 골룸바는 여회장으로서 6년간 열과 성을 다해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교회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그림은 강완숙이 왕실인 은언궁 송씨를 찾아 교리를 가르치는 모습(탁희성 화백). ▲ 강완숙 골룸바 복자화 압도적 존재감 강완숙은 초기 교회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1801년 신유박해의 공초 기록인 「사학징의」에 그녀의 이름은 128회나 등장한다.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장 정약종보다 훨씬 비중이 높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실포 사건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냈지만, 기본적으로는 6년간 그녀의 집이 주된 거처였다. 신부는 강완숙의 안방 안쪽에 달린 협실(挾室)에서 기거했다. 주 .. 2022. 2. 20.
86. 100년 전의 연극대본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 100년 전 주문모 신부 시복 기원하며 입국~순교 과정 10막으로 구성 ▲ ▲주문모 신부의 일대기를 담은 연극 대본 「고려치명주아각백전략」의 제8막 첫 부분. 8막 제목은 ‘주 신부가 관아에 스스로 자수하고 심판관이 참수형을 언도하다’라고 쓰여 있다. ▲ 연극 대본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표지. 원본은 중국 서가회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920년대 초 중국 강소성 천주교회의 연극대본 「한어기독교진희문헌총간(漢語基督敎珍稀文獻叢刊)」(중국 광서사범대학출판사, 2017) 제1집 제10책은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기록한 책만 따로 묶었다.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은정형(殷正衡, 1840~1914) 신부가 중경(重慶)에서 펴낸 「고려주증(高麗主證)」 5권 2책과 1900년에 중국인 신부 심칙관(沈.. 2022. 2. 13.
85. 주문모 신부의 동선과 24시 교우들 집 전전하며 밤에는 성직 수행하고 낮에는 교리서 집필 ▲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 주문모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는 존재였고, 조선 신자들은 교회에 하나 뿐인 목자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은 어농성지에 있는 주문모 신부 동상. 창백한 낯빛에 긴 구레나룻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주문모 신부의 도착은 천주교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으니, 이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맞아들였다”고 썼다. 1795년 실포 사건 이후 신부가 조선에 와 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지면서, 주 신부는 끊임없는 사찰과 체포 시도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달레는 조선 교회가 오직 하나뿐인 목자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고 하면서, “주문모.. 2022. 2. 2.
84. 죽여서 입을 막다 주문모 신부 입국 사실 숨기려 윤유일·최인길·지황 비밀리에 처형 ▲ (왼쪽부터) 복자 윤유일 바오로·최인길 마티아·지황 사바.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에도 주문모 신부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계동 최인길의 집을 극적으로 탈출했다. 최인길의 가짜 신부 행세는 포도청에 압송된 뒤 바로 들통이 났고, 기찰포교에 의해 대신 윤유일과 지황이 잇따라 붙잡혀 왔다. 최인길·윤유일·지황 세 사람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이튿날 새벽 옥에서 순교했다. ▲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키려고 가짜 신부 행세를 한 최인길 마티아. 그림=탁희성 화백 기록에서 사라진 세 사람의 죽음 1795년 5월 11일, 한영익의 밀고에도 주문모 신부는 정약용의 도움을 받아 계동 최인길의 집을 극적으로 탈출했다.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최.. 2022. 1. 24.
83. ‘주님의 기도’ 어떻게 바쳤을까 뜻 모르고 한자음으로 외웠지만 말씀의 힘이 주는 감동은 충분 초기 교회의 기도 생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기도문을 어떤 방식으로 바쳤을까? 「사학징의」 끝에 수록된 「요화사서소화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압수품목 중에 기도 생활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물품은 염주(念珠), 즉 묵주다. 십자패가 달린 묵주가 한신애의 집에서 4꿰미, 오석충의 집에서 3꿰미, 윤현의 방구들 밑에서는 8꿰미, 김희인의 집에서도 6꿰미나 쏟아져 나왔다. 정섭과 정광수, 김조이의 집 압수물품 목록에도 묵주가 어김없이 들어있다. 여주 김건순의 무리에 속했고, 원경도의 외종으로 포도청에 끌려온 김치석은 이렇게 진술했다. “1798년 정월에 원경도가 저에게 사학을 하라고 권유하면서 책 3권과 베껴 쓴 5, 6장의 첩책(帖.. 2022. 1. 16.
82. 교리 교육과 십계 공부 계명마다 구체적 행동 규범 제시하고, 하나하나 실생활에 적용해 설명 ▲ 일본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천주십계」 1877년 필사본 표지와 첫 면. 십계는 교리 교육의 출발점 초기 교회의 교리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이나 여성에게 처음으로 행하는 입문 교리는 ‘십계’였다. 지적 수준이 높은 양반들이 「칠극」과 「천주실의」로 서학 공부를 시작한 것과는 다르다. 벽동의 김치 가게 주인 최조이가 정광수의 처 윤운혜를 처음 만났을 때 일이다. 최조이가 선물에 감사하며 무심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자, 윤운혜가 질색을 하며 그걸 외우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서 십계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것을 외우면 죽은 뒤에 천국에 올라갑니다.” 「사학징의」에 나온다. 십계 공부를 신앙의.. 2022. 1. 10.
81. 보험 들기 ▲ 「벽위편」에 실린 이기경의 「초토신 상소」.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이 상소문으로 이기경은 상복을 입은 채로 함경도로 귀양가야만 했다. 서학에서 돈과 곡식이 나온다 정조는 채제공 휘하의 이가환과 정약용 등 참모진으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이끌어가려 했다. 이들은 똑똑하고 반짝반짝 빛났다. 기성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라면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이 서학에 깊이 이끌렸던 부분은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채제공의 손발로 부상하던 이들 그룹이 서학 문제에 연루되면서, 정조와 채제공으로 이어지는 라인업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다. 채제공에게 내쳐진 홍당(洪黨)의 남인들은 적의 적인 노론 세력과 손을 잡고 반채 전선의 동력을 이어갔다. 공서파들은 서학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 2022. 1. 10.
80. 두 과부의 전쟁 채제공 둘러싼 채당·홍당 싸움으로 정조의 개혁 구상 뒤엉켜 ▲ 1791년 이명기가 그린 채제공의 전신 좌상 시복본 초상. 번암이 짓고 쓴 찬문이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이겨도 지는 싸움 안정복과 권철신, 이기양과의 서학을 둘러싼 논쟁이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곧이어 남인 내부의 정파적 투쟁으로 변질되면서 비극이 싹텄다. 남인 학맥의 뿌리에 성호 이익이라는 거목이 있었다면, 정계에는 번암 채제공이라는 불세출의 정객이 버티고 있었다. 오랜 야당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던 남인들에게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던 채제공은 유일한 희망이자 최고의 구원투수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얼마 못 가 정치적 시련이 닥쳤다. 그는 1780년 홍국영의 실각 이후 거의 죽음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 1786년 12월까지 본의 .. 2021. 12. 26.
79. 성호 이익의 진의 남인 학맥의 수장 성호 “마태오 리치는 성인이라 할 만하다” ▲ 성호 이익이 홍유한에게 보낸 친필 편지. 홍유한 부친의 부고를 받고 생전의 교분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종손 홍기홍 제공 성호 선생도 서학을 했다던데요? 서학 도입기에 남인들이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려 싸운 것은 비극이었다.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노선 차이에다 임금 정조의 정국 새판 짜기와 맞물리면서 이들의 싸움은 차츰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구경만 하면 되는 꽃놀이패였다. 이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남인 학맥의 수장이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자신이었다. 서학에 대한 성호 이익의 모호한 태도가 원인을 제공했다. 서학에 대한 성호의 진의가 어느 지점에 있었는지를 두고는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2021. 12. 17.
78. 이합규와 서소문 신앙공동체 교리 가르치고 세례 베푼 ‘교주’… 「사학징의」 전체에 49회 등장 ▲ 이합규는 황사영과 함께 당시 서울 교회를 대표하는 평민 지도자였고, 서소문 인근 사창동 신앙 공동체를 이끌던 수장이었다. 사진은 서소문 순교 성지 순교자 현양탑. 가톨릭평화신문DB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준 걸출한 교주 「사학징의」 중 한신애 아가타의 공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 교우 중에 가장 높은 자는 중인으로는 이용겸(李用謙: 이합규)과 김심원(金深遠)이고, 양반 중에서는 정광수와 황사영 진사입니다.” 정복혜는 또 “이합규(李逵, ?∼1801)는 교주라 불렸고, 밤중에 혹 불러오기도 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서울의 남자 교우 중에 서열이 가장 높은 네 사람 중 중인 신분으로 이합규와 김심원 두 사람을 지목했다. 그런데 막상.. 2021. 12. 17.
77. 서양 배에 오른 현계흠 플로로 영국 해군 배에 오른 현계흠, ‘대박청래’ 근거를 제공하다 ▲ 현계흠이 부산 동래에 내려왔다가 용당포에 정박한 영국 해군 탐사선을 방문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현계흠의 사형 이유 현계흠(玄啓欽, 1763∼1801) 플로로는 족보명이 현계온(玄啓溫)이고 자는 사수(士秀?)로 알려져 있다. 1800년 당시 그의 집은 명도회의 6소(所) 중 한 곳이었고, 윤지헌이 상경했을 때 현계흠의 집에 머물던 주문모 신부와 만난 일이 있다. 현계흠은 한양 서부 관정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남부 회현방(會賢坊)의 선혜청 인근 장흥동(長興洞)에 있었다. 오늘날 회현동 일대다. 그에 관해 남은 기록이 대단히 소략한 것과 달리 당시 교회에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학징의」 속 이합규의 공초에 따르면 현계흠.. 202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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