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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성서의인물(구약)

[59] 야훼의 종 오바디야

by 세포네 2006. 4. 23.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비탄과 고통에 잠겨있을 때 팔레스티나 남쪽에 살던 에돔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약탈하는 등 몹시 괴롭혔다.

 

오바디야 예언자는 에돔 민족의 악행을 신랄하고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에돔인들에게 닥칠 야훼의 벌과 재앙을 예언했다. 오바디야 에언서는 신구약을 통해 겨우 21절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느님의 정의, 교만한 자의 최후, 하느님의 절대적인 왕권 등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다.

 

오바디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함락 전의 인물로 짐작되며 유다의 예언자로 상상할 수 있다. 아주 짧은 내용의 오바디야 예언서이지만 신앙의 마지막 승리를 예언하는 용맹스러움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오비디야는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부흥을 예언하였다. 에돔이 멸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 남부와 사해 일대의 에돔은 에사오의 후손들이 거주하던 땅으로 야곱 후손들과는 형제뻘이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에돔을 이해하려면 에사오와 야곱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도 유다가 멸망했을 때 에돔인들은 약탈을 서슴지 않았고 바빌론인들에게서 유다인들을 노예로 사서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바디야는 이런 에돔인들의 야비하고 잔혹한 행위에 대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오바디야는 에돔에 대해 무서운 예언을 한다.

 

"한 동기인 야곱의 후손을 죽인 죄로 너희는 치욕을 당하고 영영 망하게 되었다. 오랑캐가 예루살렘 성문을 부수고 들어와 약탈한 후 서로 나누어 가지던 날 너희는 도와주기는 커녕 도리어 한통속이 되었다"

 

적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 있다. 족보를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면 한 동기간이 되는데도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 고소해 하고 오히려 환난을 부추기고 그 통에 이익을 취했던 에돔인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오히려 적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가깝다면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뒤통수에 칼을 대는 야비하고 파렴치한 행위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예언서의 첫 부분이 배신한 에돔에 대한 증오로 불타고 있는 것도 가깝다고 생각한 형제로부터 배신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에돔에 벌을 내리겠다는 예언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엄격한 정의가 담겨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오바디야란 ?야훼의 종?이라는 의미다. 예언서에 나타난 오바디야의 모습은 열렬하고 충실한 유다인으로서 역사학도로 생각할 수 있다. 엄격하고 분명한 필체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오바디야의 모습은 엄숙하고 담대한 예언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렇게 바위굴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높다랗게 집 짓고 살고 있는데, 누가 우리를 저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랴 하며 으스대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거기에서 끌어 내리리라"(오바디야 1, 3-4).

 

에돔은 산악지대로 바위굴이 많고 자연적인 요새가 많아 적의 공격으로부터 위험을 모면할 때가 많았다. 에돔인들은 자신들이 강한 줄 알고 교만해져 있었다. 예언자는 이런 에돔이 결국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예언을 하고 있다.

 

"동기가 재난을 당하는데 너희는 고소하게 여기고, 유다 백성이 망하는데 흐뭇해 하며 그 재물에 손을 대고, 너희 동기들이 도망치는데 길목에서 쳐죽이며 살아 남은 자들을 남의 손에 팔아 넘기니 너희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오비디야 1, 12-14 참조)

 

다윗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던 에돔이 기원전 8세기께 독립한 후 형제국인 유다를 적대시하고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지른 죄악이 멸망의 원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에돔의 죄악은 형제간의 불화, 같은 동족간의 분열이 있는 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죄악이다. 가까운 친지나 이웃의 고통과 수난에 눈감고 도리어 그 틈을 타서 이익을 챙기는 파렴치한 죄악이 바로 오늘날 재현되고 있는 에돔의 죄악이다. 결국 에돔은 멸망으로 치닫는 벌과 재앙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정의의 하느님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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