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율법은 하느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영역만 제한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망라하는 법이었습니다. 개인의 삶과 사회 생활 전반을 다스렸던 이 율법은 이스라엘 사람들 삶의 절대적 준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시대에 이 율법의 준행을 둘러싸고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문제들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첫째, 이 율법의
준행이 점점 외형적으로만 기울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율법만 조목조목 지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인이
되는 길은 율법을 자구적으로 충실히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의인’으로 판정된 자만이 하느님의 상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중략)
둘째, 이 율법이
왜곡되면서 사람들을 계층화시키는 페단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생활여건상 율법을 지키는데 유리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을
‘의인’으로 자처하고 그 밖의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기 일쑤였습니다. 성서에서 우리는 이들이 ‘세리’, ‘창녀’, 떠돌이 ‘민중’(그:
ochlos)들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 준수 여부가 계층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필연적으로 율법에서 소외된
계층이 생기면, 결국 율법이란 지배자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향하여 예수는 매서운 질책을 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중략)
예수는 율법을 거부하고 파괴하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중략) 결국, 예수의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이 주장은 집권층과 대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율법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권한을 가진 랍비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썩 내키지 않는 이 ‘랍비’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로 여러 가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랍비), 안식일에 황소가 웅덩이에 빠졌다면 그것을 건져내도
되겠습니까?”
“선생님, 우리들은 로마에 세금을 갖다 바쳐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 간음하다 들킨 여인을 붙잡아 왔습니다. 우리의 모세 율법은 이러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한 8,1-11 참조).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이러한 질문은 오히려 예수에게는 저들의 문제를 확연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껍데기’를 들고 와서 ‘이게 왜 이러냐’고 탓을 하는 그들에게 예수는 그 껍데기를 보지 않고 ‘알맹이’를 들고 와서
그 알맹이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궁지에 빠지는 것은 껍데기를 알맹이로 착각하고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당하는
것은 번번히 시비를 걸어오는 쪽이었습니다.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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