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절망, 응답 없는 기도 등은 신앙인마저도 분노와 혼란에 빠트리게 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마침내 불만이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질문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신다면, 왜 나는 그분을 느끼지 못할까?”, “만일 하느님께서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하도록 허락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을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하느님은 십대 청소년들이 자살하려고 할 때 막지 않으실까?”,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악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하려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걸까? 살다보면 ‘의심’ 또는 ‘회의’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중략)
이래서 생기고 저래서 생기는 것이 의심입니다. 믿음 생활에는 의심이 따라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확신과 부정 사이에 의심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합니다. 완전한 확실함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디서 믿음의
필요성을 느끼겠습니까?
의심을 통해서 믿음에 이른다
의심은 잘못된 것일까? 의심이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일까? 적당히 하는 의심은 그럴 수도
있지만, 진지한 회의(懷疑)는 궁극적으로 더 큰 이해와 더 깊은 신앙에로 인도합니다. 또한 더 가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성서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의심의 단계를 거쳐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중략)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분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을 결정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의심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별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셨습니다(마태 11,3 참조). 또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이 메시아임을 의심하고, 당신을 철저하게 배반했던 베드로(루가 22,60 참조)를 받아들여 주시고 교회의 기초로 삼아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토마가 당신의 부활을 의심한다고 그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실제로 보여주심으로써 토마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요한 20,25 참조).(「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1권 130-4쪽 발췌)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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