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꼭 ‘어머니’와 대칭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은 자비롭게 당신 자녀들을 대하시고, 모두를 생명으로 부르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부성적(父性的)이면서, 모성적(母性的)이십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부성은 또한 모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과,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의 친밀성에 더 주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239항).
렘브란트의 유명한 성화 ‘돌아온 탕자’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부성적이면서 모성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둠을 훔친 작가’로 불리는 렘브란트는 성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려 명작들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이
작품은 그가 성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성서에서 하느님이 부성애와 함께 모성애를 지니신 분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돌아온 아들을 얼싸안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렘브란트는 아들의
등에 얹혀 있는 두 손을 서로 다르게 그렸습니다. 한 손은 크고 힘센 아버지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손일
것입니다. 다른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모성적인 보살핌과
양육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렇게 그렸을 터입니다.
성서는 모성적(母性的)인 하느님의 성품을 곳곳에서 표현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라하힘’이라는 단어가 자궁 또는 모태를 뜻하는 ‘레헴’에서
왔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의 자비심은 부성애보다는 모성애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애절한 사랑이 젖먹이 어미의 심정에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셋째, 하느님의 애타는 마음이 아이를 양육하는 어미의 애간장 녹는 모정에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호세 11,3-4.8).
이처럼 하느님은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이기도 하십니다. 하느님은
‘어버이’이십니다.(「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1권, 160-16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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