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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주교좌성당] 원주교구 원동성당

by 세포네 200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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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신앙의 주춧돌'
강원도 원주시 원동 언덕에 자리잡은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園洞)성당. 언뜻 보면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성당일 뿐이지만 지난 100여년간 강원도 지역 선교의 요람으로, 특히 70년대는 반독재 투쟁의 불씨를 지피며 민주화 운동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원동성당이 한국 교회사에 써온 이력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원동성당은 규모가 아닌 내실로 따지자면 어느 교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원주교구와 닮은 꼴이다.

교구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이 주교좌본당으로 지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원동주교좌본당은 1888년에 설립된 강원도 최초의 본당인 풍수원본당과 부엉골본당에 이어 1896년에 설립된 세번째 본당이다. 그러나 1896년 부엉골본당의 부이용(Boullion) 신부가 충청도 장호원에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 떠나고 부엉골본당이 공소로 격하됨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두번째 본당인 셈.

 

원주본당(원동본당의 옛 이름)은 풍수원본당의 르메르(Le Merre,1896∼1898년 재임) 신부가 원주 상동

 

리(현 가톨릭센터 자리)의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구입하고 1896년 8월17일에 부임함으로써 설립됐다. 당시 신자 수는 1134명, 관할 공소는 20개였는데 원주읍내의 신자는 3명에 불과했으며, 대부분의 신자는 공소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성당 부지를 매입한 이는 제3대 드브레(Deverd, 1900∼1906년 재임) 신부였다. 6년동안 재임하면서 교세 확장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온 드브레 신부는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열두채와 부지 2천여평을 구입해 성전의 터전을 마련했으며, 제4대 시잘레(Chizallet, 1906∼1908년 재임) 신부는 2년간 500여명에게 세례를 주는 한편 성당 신축을 대비해 목재를 비축했다. 이 같은 준비에 힘입어 제5대 조제(Jaugey, 1909∼1923년 재임) 신부는 1913년 건평 70평 규모의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고 경성교구장 뮈텔(Mutel, 1890∼1933년 재임)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 성당은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초 유엔군의 오폭으로 인한 화재로 다 타버리고 만다. 1951년 피란에서 돌아온 신자들이 불에 탄 성당의 벽돌들을 정성스럽게 고르고 다듬어 소성당을 지었는데, 이 소성당은 새 성전이 신축된 다음 소화유치원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교리실로 활용되고 있다.

지금의 성당 건물이 세워진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가을이었다.
제17대 이 바드리시오(Patrick, 1950∼1955년 재임) 신부는 소성당을 완공한 직후부터 파괴된 성전의 재건을 서둘렀다. 그는 1953년말 중국인 가(賈)씨에게 기본 설계를 맡기고 외국의 독지가들에게 편지를 띄워 도움을 요청했다. 이듬해 5월부터 시작된 기초공사에는 주로 남자 교우들이 동원돼 작업을 진행한데 이어 6월부터 시작된 벽돌쌓기에는 여자 교우들과 학생들까지 동참해 벽돌을 날랐다.

성전 공사는 모든 본당 교우들이 합심한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됐으며, 9월에는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어 120평 규모의 새 성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새 성전의 축복식은 1954년 10월 당시 원주본당이 속해 있던 춘천교구의 교구장 구 토마스(Quinlan Thomas, 1945∼1966년 재임) 주교의 주례로 거행됐다.

1957년 학성동본당을 분할하면서 ‘원주’에서 ‘원동’으로 이름을 바꾼 원동본당은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됨에 따라 그 해 6월 원주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설정됐다. 초대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착좌를 지켜보면서 원주교구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른 원동성당은 이후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서면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전면에 등장한다.
“정면 중앙에 종탑을 둔 장방형 건물로, 폭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긴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관할 성당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외벽 처리를 석조나 적벽돌로 하지 않고 인조석 물씻기로 했으며, 50㎝마다 줄눈을 두어서 석조와 같은 느낌을 준다. 중앙 종탑의 꼭대기에는 돔을 얹었는데, 이는 횡성성당과 더불어 50년대의 원주지방 성당의 상징이 되고 있다. 성당 좌우의 출입구는 현재 벽을 막아 고해실로 사용 중이다. 성당 내부는 기둥 없는 강당형 공간으로, 제대부의 뒷벽은 엡스의 돌출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신축 당시 성당의 종과 14처, 창문의 색유리, 제구 등은 프랑스에서 들여왔다. 원래는 성당의 종탑 위 십자가에 야광(夜光)을 입히려고 했는데 공사장 인부가 실수로 야광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입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성당의 종소리는 반경 십리까지 들렸다. 지금은 종의 울림이 건물에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진단에 따라 아주 특별한 때가 아니면 종을 치지 않는다. 예전 성당의 종은 1956년 문막공소 강당(현 문막성당)이 건립될 때 옮겨져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원동성당 내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1960년대말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간다. 최창규 주임 신부(1966∼1969년 재임)는 사제가 제대가 아닌 교우들을 향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먼저 성당 앞면 벽에 붙어있던 높은 제대와 소제대, 좌우 벽면에 안치된 성모상과 성 요셉상을 철거했다. 또 제대 좌측에 있던 주교좌와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설치된 성체 난간과 마루로 된 제대 바닥을 모두 철거한 다음 제대 바닥을 지금과 같은 인조대리석으로 교체하고 중앙에 돌로 된 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성당 앞면 벽에는 현재의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왼쪽에 간소한 주교좌를 마련했다.

원동성당은 유신 치하인 1974년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1965∼1993년 재임)의 구속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부상한다. 지학순 주교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74년 6월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된 사건은 전통적인 신심만 강조하던 한국교회가 이후 방관자적인 자세를 버리고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데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지 주교의 적극적인 행동에 자극을 받은 전국 각지의 사제 300여명이 그 해 9월말 원동성당에서 모임을 가진 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한 것은 국민들에게 원동성당을 민주화의 요람으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직인 계기가 된다. 사제단이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벌이는 등 ‘실천하는 신앙’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곳이 바로 원동성당이었던 것이다. 당시 초미의 관심을 끌던 지 주교의 구속과 맞물려 그가 교구장으로 있는 원주교구의 주교좌 원동성당은 자연스럽게 민주화의 요람으로 떠올랐다.

1993년, 원주교구의 초석을 쌓은 지 주교의 장례미사가 봉헌되고, 김지석 주교의 제2대 교구장 착좌미사를 지켜본 곳도 원동성당이다. 특히 김 주교는 원동본당 출신인데다가 이 본당의 보좌와 주임 신부를 모두 역임한 터라 김 주교의 착좌를 바라보는 원동성당 신자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설립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90년에 교육관을 신축한 원동성당은 100주년을 한해 앞둔 95년에 본당가와 본당기를 공모하고 100주년 기도문을 제작하는 한편 96년에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새천년대에 들어선 원동본당이 우선적으로 꼽는 과제는 2005년 설정 40주년을 맞는 원주교구가 교구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지난 2001년부터 다섯 단계로 추진 중인 ‘새 시대 복음화 여정’의 적극적인 실천이다. 원동본당은 이 여정에 따른 올해의 교구 사목방침인 ‘복된 가정의 해’를 실현코자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실시하며 교구 대표 성당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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