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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주교좌성당] 서울교구 명동성당

by 세포네 200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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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심장
주교좌(主敎座)의 협소한 의미는 ‘주교가 앉아 교회의식을 행하는 의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가 발전하고, 또 세상 한가운데로 나오면서 주교좌성당은 지역교구의 역사와 문화를 응축한 곳이요, 지역사회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터전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구의 주교좌성당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주교좌성당을 설립연대 순으로 주교좌성당의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건축사, 문화예술적 가치 등에 이르기까지 주교좌성당의 모든 것을 2002년 5월 19일부터 평화신문에 연재 했던 내용을 하나하나 올려봅니다.
‘한국교회 1번지’ 명동대성당.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었지만 10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 자체가 우리들에게 또 다른 메시지로 다가온다.

명동대성당이 자리잡은 언덕의 옛 지명은 종현(鍾峴)이다. “남부의 종현은 명동과 저동 사이에 있는데 지대가 높고 조망이 좋은 곳이다. 윤정현(이조판서 벼슬을 지낸 인물)의 집이 그 마루턱에 있었는데 10여년 전 서양인이 이를 구입하여 철거하고서 평지를 만들어 교회당을 세워 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황현의 「매천야록」)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최초의 성당 터를 왜 종현에 잡았을까? 널리 알려져 있듯이 종현 언저리에는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가 유학자들과 함께 첫 신앙집회를 연 명례방((明禮坊)이 있었다.

교회와 인연이 있는 야트막한 구릉을 성당부지 1순위로 꼽는 서양인들에게 종현은 더 없이 매력적인 장소였다. 부지는 황해도 사람 김 가밀로 명의로 1883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분할 매입했다고 기록돼 있다.

성당은 1892년에 정초식을 갖고 6년 만인 1898년에 완공했다. 설계를 맡은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몽펠리에 주교좌성당을 본 따 전통 고딕양식을 채택했다. 건축규모는 길이 68m, 폭 29m, 종탑높이 47m, 연면적 612평.
선교사와 신자들은 서양건물을 짓는 미장이나 목수도 없는데다 자재 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처럼 웅장한 건물을 짓느라 숱한 고생을 했다. 당시 조선대목구의 총 신자수는 약 1만4500명. 선교사들은 전국 곳곳에 편지를 띄워  “한양에 천주당을 세우니 모두 부역에 나서라”고 독려했다. 이 기별을 받은 신자들은 농사철을 피해 개나리 봇짐을 매고 성당에 도착해 보름 이상씩 부역을 하고 돌아갔다.

명동대성당은 ‘가장 규모가 큰 첫 고딕양식 건축물(사적 제258호)’로 한국근대 건축사에 기록돼 있다. 특히 일본을 통하지 않고 서양에서 곧바로 유입된 순수한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라 초기 양식건축 연구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명동대성당은 또 다른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중세시대에 절정을 이룬 고딕 건축양식은 웅장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한양 한복판에 들어선 명동대성당은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이겨낸 한국교회가 이제부터 찬란한 신앙의 꽃을 피우겠다고 다짐하는 각오의 표현이기도 했다.

방문자들은 대개 성당의 유명세와 웅장한 규모에 압도돼 외형만 보고 돌아가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종교미술의 혼과 순교자들의 넋이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언뜻 복잡해 보이는 제단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십자가와 감실을 품고 있는 작은 뾰족탑을 받치고 있는 대리석 제대가 바로 대성당과 역사를 같이한 주제대(High Altar)다. 이 제대판 아랫면에는 건립연도 1898년과 당시 교구장 뮈텔 주교의 사인이 음각되어 있다.

요즘 미사를 봉헌할 때 사용하는 그 앞의 목조 제대는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1925년)을 기념해 제작된 것이어서 ‘복자 제대’라고 부른다. 지하성당에 남아 있는 부제대 2개를 포함해 대성당의 제대수가 총 8개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제대 뒷벽에 나란히 배열된 ‘14사도상’은 꽤나 유명한 작품이다. 12사도 외에 성 바오로와 성 바르나바를 추가한 이 작품은 한국 교회미술의 개척자인 장발 화백이 79위 시복식을 기념해 그 이듬해에 제작, 설치한 것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개를 들고 중앙 제대를 비추고 있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해 보자. 명동대성당은 한국에서 최초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유리창 장식으로 사용한 곳이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 종류는 돌출머리(Apse) 부분과 소매채 부분의 창에 부착된 성화이다. 돌출머리(제단 위)에 있는 5개의 길쭉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모 마리아의 잉태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의 일생 중 15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나머지 한 종류는 옆 복도 창과 높은 창에 부착된 각종 장식 문양이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원래 프랑스의 베네딕도회 수사들이 제작한 것이지만 현재의 것은 스테인드글라스 종교미술에 심취한 고 이남규 화백이 1982년부터 2년간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이는 서양 수사들의 작품을 한국의 예술가가 새로운 기법으로 마무리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한때 4대문 안에 사는 백성들의 시계 역할을 했던 종(鐘)은 심한 균열이 생겨 1967년에 교체한 것을 지난해 부활대축일에 또 한번 바꿨다. 현재의 종(지름 1.2m, 무게 1t)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룩의 한 수공업체에서 만든 것인데 제작·운송·설치에 총 3억원이 소요됐다.

신앙 선조들의 순교혼을 느끼려면 대성당 외곽을 돌아 지하성당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하성당에는 박해의 칼날에 스러진 앵베르 주교, 최경환 등 순교성인 5위와 순교자 4위의 유해가 봉안돼 있다. 대성당 중앙 제대 바로 아래에 이런 지하성당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의 피’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음을 상징하고도 남는다.

사회적으로는 1970년∼80년대에 시대의 아픔과 민중의 눈물을 가슴에 끌어안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낳은 모태(母胎)와도 같은 곳이 명동대성당이다.
지금도 386세대들은 “명동성당 언덕을 바라보면 1987년 6월 항쟁 당시 경찰의 무력진압에 맞서 ‘성당에 들어오려거든 우리를 밟고 지나가라’고 외쳤던 사제단의 절규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명동대성당은 지금 ‘문화의 광장’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비복음적이고 반생명적인 문화가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현대사회에서 복음적인 문화로 현대인들의 문화적,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일이 시대적 사명이라고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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