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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가보고싶은 성당

[주교좌성당] 인천교구 답동성당

by 세포네 200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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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항도 제물포에 우뚝 선 '신앙의 요람'


1883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할 당시 인구 100여명에 불과했던 작은 어촌 제물포(인천의 옛 지명)가 지금의 거대한 도시 인천으로 성장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인천의 한복판 중구 답동 언덕에 우뚝 솟은 인천교구 답동(畓洞)주교좌 성당. 인천 앞바다를 고즈넉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답동성당은 인천 시민들과 온갖 풍상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해온 인천의 산 증인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또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재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당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 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 중림동·명동성당 등 설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1860∼1938년,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를 주고 사형당할 때까지 도움)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 때가 1889년 7월 1일.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답동성당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1893∼1904년 재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서양식 3층 벽돌 건물인 수녀원이 먼저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 2명이 파견되어 보육사업과 무료 진료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 사회복지 사업의 시초인 해성보육원과 해성병원의 출발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날의 일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7시경 신부들이 두 대의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성당의 강복식이 거행되었고, 다시 미사와 81명의 교우들의 견진이 있었다. 성당은 매우 아름답고 성공적인데,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리면과 교우들의 반은 앉을 수 있는 의자들도 갖추었다…본당의 야산과 밭들은 다 조선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요술처럼 훌륭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1904∼1937년 재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답동성당이 명실상부한 선교의 거점으로, 그리고 인천 지역의 명물로 떠오른 것은 1904년부터 1937년까지 무려 33년간이나 주임신부로 활동했던 제4대 드뇌 신부 때부터다.

1899년부터 본당에 거주하면서 제3대 주임 마라발 신부를 도와 사목을 함께 했던 터라 본당과 인천지역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던 드뇌 신부는 그야말로 ‘준비된’ 주임 신부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부지 침입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시 소래읍)·고잔(김포시 검단면)·구월리·부평 등에 공소를 신설하는 한편 같은 해에 영종도 공소 경당을 축성했다.

드뇌 신부는 또 1909년에는 신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마라발 신부가 1900년에 설립한 박문학교의 교장을 맡아 학교 운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박문학교는 1910년 여자부 신설, 1914년 교사 신축, 1917년 남·녀부 통합 및 ‘인천박문학교’로 개칭 등의 과정을 거쳐 인천의 명문 사립학교로 자리잡는다. 그는 이밖에도 1915년에 바오로 성인을 본당 주보 성인으로 정하고 1933년에는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되는 성당 증축 공사에 나서는 등 답동성당의 토대를 쌓으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답동성당은 제5대 임종국(1937∼1958년 재임) 신부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신부를 맞게 된다. 임신부는 20여년간 재임하는 동안 8·15해방과 한국전쟁 같은 엄청난 사건들을 겪으며 본당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8년 부녀회원들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를 조직하고 회장단과 복사단을 정식으로 구성한 것은 물론 성모회의 활동을 활성화하는 등 평신도 단체 설립에 앞장서온 임 신부의 노고에 힘입어 답동성당은 1940년대초 신자수가 3천여명에 달할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답동성당은 1958년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로부터 분리돼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이 지역의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제6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버크(1958∼1963년 재임,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는 영흥·선재·풍도·이작도 공소를 설립하고 60년에 도화동·해안동본당을, 62년에 화수동본당을 분가시키며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1961년 6월 교황 요한 23세가 ‘인천 감목 대리구’를 ‘인천 대목구’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구장에 나길모 주교를 임명함에 따라 답동성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나 주교는 이후 무려 41년간 재직한 후 올해 4월 교구장직을 최기산 주교에게 넘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답동성당은 제7대 설리반 신부에 이어 1968년 제8대 강의선 신부가 부임하면서부터는 한국인 신부가 주임을 맡아왔다. 특히 10대 김병상(1975∼1980년 재임) 신부 때부터는 평신도 활동의 확대, 시국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이웃 돕기 활동 등을 통해 본당의 활성화는 물론 사회와 함께 하는 본당상을 구현하는 데 많은 앞장서고 있다. 또 13대 강용운(1986∼1992년 재임) 신부 때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답동대성당 100년사」를 발간하고,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했다.

1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인천시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항도 인천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온 답동성당. 그러나 오랜 세월 탓일까. 과거 인천의 중심지였던 답동지역이 탈 도심화의 바람 속에서 예전의 위세만 못하다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적 제287호로 지정된 지금의 답동성당은 1897년에 완공된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1933년부터 4년간 시잘레 신부(1882∼1970년, 파리외방전교회, 초대 혜화동본당 주임)의 설계에 따라 외곽을 확장 개축한 310평 규모의 건물로, 초창기 교회 건축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정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고전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인 답동성당은 같은 건축 양식으로 세워진 전주교구 전동성당과 겉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답동성당은 주로 순수 자연석을 사용한 이전의 서양식 성당과 달리 돌과 벽돌을 섞어 지은 것으로, 내부기둥과 2층 바닥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을 혼합했다. 적벽돌을 주된 재료로 썼지만 건축미를 살리기 위해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을 사용하기도 했다.

답동성당 건축미의 절정은 정면을 장식하는 3개의 종탑이다.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듯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8각형의 중앙 종탑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안정적인 형태미를 더한다. 양끝에는 작은 8각탑 2개를 두어 20세기 초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중앙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탑 꼭대기에 얹혀있는 북 모양의 작은 탑은 처마 밑 돌림띠의 석재 양식과 함께 정면 외관을 정중하고 화려하게 수놓았다.

성당 정면에서 눈에 띄는 장식은 한 가운데 형식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장미 문양의 장미창 뿐이다. 또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문들은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한 장식 대신 화강석으로 단순하게 처리됐다.

성당의 내벽은 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를 섞어서 물에 갠 것. 벽돌·석재 등을 접합하는 데 쓰임) 위에 수성 페인트를 칠한 것이다. 제대부 벽면은 진한 청색이고 나머지는 미색. 바닥은 원래 목조 마루였으나 1973년 성당 내부를 수리할 때 콘크리트 슬라브 위에 인조석을 얹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모두 원형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 기둥에 부착된 콘크리트 14처와 함께 화려한 색채의 창문 유리화가 신자들을 압도한다. 본당 설정 9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79년 6월 제작에 들어가 6개월만에 완성된 이 유리화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상적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대 뒤쪽의 유리화 15점(가로 60㎝·세로 400㎝)에는 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좌우 창문 유리화 16점(가로 150㎝·세로 600㎝)에는 성서의 주제가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화와 함께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피에타 그리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등을 강렬한 톤으로 형상화했다. 다소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하면서도 현란한 선의 움직임과 색체가 그런 이미지를 살짝 가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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