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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덕적도의 슈바이처, 최분도 신부

by 세포네 2007.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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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최 신부가 병원선 바다의 별을 타고 이웃섬에 방문하자 어린이들이 뛰어나와 환영하고 있다.
우) 가정에 직접 방문하여 약을 전달하고 치료를 돕는 최분도 신부

덕적도의 슈바이처, 최분도 신부

덕적도와 연평도 본당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17년간 낯선 이국땅 서해 낙도에 파묻혀 가난한 어민들을 위해 젊음을 바친, 덕적도의 슈바이처라고도 불리는 최분도 신부이다. 미국 전통적인 가톨릭집안(10남매 중 4자매는 수녀, 3형제는 신부가 됨)의 다섯째로 태어난 최분도 신부, 1959년 한국 메리놀 본부에 나와 연평도와 인연을 맺었고 66년 4월 덕적도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그곳을 영원한 선교지로 결정하고 덕적섬의 개척을 위한 의지를 굳혔다. 

서포2리 대규모 간척사업은 그가 연평도본당에 있던 62년부터 시작되었고, 덕적도본당 부임후에는 복자 유베드로 병원을 세워 의료 활동을 펼쳤다. 이외에도 상수도, 전기, 해태양식 등으로 덕적도가 '문명'과 만나는데 기여했다. 또한 덕적도공소 회장을 지낸 서재송씨와 함께 전쟁고아들과 혼혈아 1천여 명의 미국 입양을 주선하기도 했다.

외국인 신부를 경계하던 주민들은 최분도 신부의 때묻지 않은 마음에 매료되어 갔고, 미사가 있는 날이면 하나 둘씩 자발적으로 성당에 모여들었다. 그가 송림동본당으로 이임하던 1976년에는 주민의 45%가 신자라는 놀라운 복음화율을 보였다.
최 신부는 1990년 미국으로 발령, 신학생 육성에 매진하다가 1997년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제2의 ‘덕적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복합척수염 선고를 받았다. 2001년 3월 30일 미국 뉴욕 메리놀 신학대학내 대성당에서 치러진 최 신부의 장례미사에는 한국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수십 명의 한국인이 고인이 된 신부를 애도했다.

그가 떠나던 1976년 덕적도 주민들은 사비를 모아 서포리 해수욕장에 최분도 신부 공덕비를 세웠다. 최분도 신부는 선종하였지만 섬 주민들을 사랑으로 감싸안은 그의 마음은 덕적도 주민들과, 더 나아가 교구 신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다. 

 

◀ 정부에서도 최 신부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1년 국민훈장 동백장(2급)을 수여했고, 본국에서 많은 독지가를 모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그의 어머니 이벨린 여사에게도 석류장(3급)을 수여했다. 

 


 

 

 

 

 

 

 

 

 

◀ 왼쪽에서 세 번째부터 최분도 신부, 이벨린 여사, 서재송씨(뒷줄),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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