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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30. 답동 신용협동조합 설립

by 세포네 2007.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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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답동 신용협동조합 설립

 

농업의 비중이 매우 컸던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농업과 수산분야의 협동조합이 관제화되어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훼손당하고 있던 시점에서 신용협동조합의 자발적인 설립운동이 도시지역에서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의 한국 국민들의 대다수는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외국원조’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원조’가 아닌 ‘자조’의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중 한 가지가 신용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부산피난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메리 가브리엘라(Mary Gabriella Mulherin)수녀와 서울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장대익 신부를 꼽을 수 있다. 특히 메리가별 수녀는 캐나다 코디연구소와 세계신협협회의 협조까지 얻어 신협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당시 신협운동을 이끈 교회 인사들은 궁핍화와 비인간화로부터 서민 대중을 일으켜 세우는 길의 하나로 신협운동을 전개했고, 이것이 곧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인 1962년 3월 27일에 ‘답동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었는데, 그 목적은 신자들이 서로 협동정신을 기르고,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로써 저축한 돈을 필요할 때 낮은 이자로 대부받아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답동신용협동조합은 가톨릭 중앙신용협동조합(경향신문사 내에 있었고 현재는 남아있지 않음) 이사장 장대익 신부의 소개로 답동본당 6대 주임 장요한(John Burke)신부가 필요성을 공감하고 1961년 9월 21일 조직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신용협동조합운영을 위해 장요한 버크 신부의 요청으로 ‘협동조합 교도 봉사회’가 답동본당 신자 20-30명을 상대로 3주에 걸친 교육을 하였다. 이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신성한 교회에는 돈 거래하는 기구를 둘 수 없다는 거센 반론을 물리치게 되었고 신자 대표가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1962년 3월 27일 구좌수 97개, 조합원 49명, 기본금 48만 5,000환으로 인천 지역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이 발족되었다. 

이어 답동 신용협동조합의 적극적인 지원과 산파 역할로 도화동(1963.11.21), 박문, 송림동, 화수동, 부평2동, 주안동, 부평1동, 김포, 산곡동, 강화 등 조합이 계속 조직되었다.

인천 지역의 신협 운동은 인천, 부천, 김포, 강화 지역에 한한 것이 아니라 멀리 덕적도의 진리, 서포1리, 연평도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멀리 배를 타고 다니면서 교육을 계속할 수 없었기에 안타깝게도 한 곳도 성공하지 못했다.

현재 답동신용협동조합은 인천 중구 답동 10-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위조합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
● 정리:홍보실  ● 참고자료:인천교구사  ● 사진제공:답동신협>



좌) 초창기 조합원들의 모습
우) 답동신용협동조합 제2차 정기총회중 축사를 하고 있는 나 굴리엘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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