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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45%의 복음화율을 기록했던 덕적도 본당

by 세포네 2007.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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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의 복음화율을 기록했던 덕적도 본당

1960년대에 들어 도서지방의 전교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될 무렵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는 당시 연평도 본당 주임이었던 최분도 신부에게 인천 서남쪽에 위치한 덕적도에 본당을 신설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1966년 4월 13일 덕적도 본당(설립 당시 서포리 본당)은 공소로 생겨난지 4년여 만에 인천교구 17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최분도 신부가 부임했을 당시 덕적도는 가난과 무지로 미신이 만연한 외딴 섬이었다. 최 신부는 먼저 섬 주민들을 일깨우고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덕적도 개발에 앞장섰다. ‘복자 유베드로 병원’을 세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한 숱한 생명을 구해주었고 전기 가설, 댐 건설, 간척사업 착수 등 덕적도민들의 자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최분도 신부 부임 10년 만인 1976년에는 덕적도와 인근 6개 섬의 신자가 2,700여 명으로 주민의 45%가 신자라는 놀라운 복음화율을 기록했다. 이는 섬 주민들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헌신한 젊은 외국인 사제의 정성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결과였다.

이후 도서지방 인구의 도시집중현상으로 덕적도의 인구 역시 감소하여 덕적도 본당은 1980년 주안1동 본당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가 2002년 다시 (준)본당으로 승격하였다.

덕적도 본당은 현재 진리, 울도, 문갑, 백아도 공소를 관할하고 있으며, 지난 2006년 25년간 폐허로 있던 복자 유베드로 병원 건물을 수리하여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톨릭 교육관으로 재건했다. (덕적도를 위해 헌신한 최분도 신부의 이야기는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사진

(오른쪽) 서포1리 하천공사를 하고 있는 교우들과 최분도 신부

(맨앞 왼쪽). 그의 헌신은 아낙네들까지 공사현장으로 모여들게 했다.
왼쪽) 1961년 서포1리 공소(덕적도 본당)
아래) 진리공소에서 발견된 옛 감실과 최분도 신부가 사용하던 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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