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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29. 1961년 6월 6일 인천대목구의 설정

by 세포네 2007.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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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961년 6월 6일 인천대목구의 설정 

 

로마 교황청은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대리구를 대목구로 승격시켰다. 이어 6월 21일 청주 교구의 부감목으로 활동중이던 맥노튼(한국명 나길모) 신부에게 주교라는 명의를 부여하여 인천대목구의 첫 감목에 서임하였다.

1831년 조선 교구가 설정된 이후 수많은 고난을 겪고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된 후 50주년이 되는 해에 인천교구가 설정되었으니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 인천교구는 서울, 대구, 전주, 광주, 춘천, 부산, 대전, 청주에 이어 9번째 생겨난 교구였다.(당시 북한에는 원산, 평양, 함흥, 연길 등 4교구가 있어 한국 가톨릭 교회의 교구는 총 13개였다.)

이렇게 한국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1960년대 4.19와 5.16의 정치적 혁명 그리고 극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변화되어 삶의 의미를 묻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회측에서 볼 때는 적극적이며 폭넓고 다양한 포교 활동, 포교 방법, 교회 조직의 발전, 방인 성직자와 선교사의 증가, 많은 수도회의 진출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수도의 관문이기 때문에 나라에 외세침략이 있을 때면 전쟁의 화를 잘 입었던 인천은 그 때문에 일찍부터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그리고 신설 교구의 중심지로 교회 역사에 떠올랐다.

신설 인천 교구의 관할 지역은 인천시, 부천, 강화, 김포, 황해도 옹진군으로 정해졌다. 당시까지 관할 지역에서는 1명의 주교(제2대 전주교구장, 제6대 광주교구장을 역임한 한공열 주교가 인천 출신이다.)와 15명의 신부가 탄생했다.

인천교구에 속하게 된 본당은 답동, 송림동, 부평(현 부평2동), 김포, 강화, 도화동, 북성동(현 해안), 연평도, 백령도 등 총 9개였다. 그리고 공소 59개, 신자 23,169명, 신부 19명(메리놀 회원 18명, 중국인 신부 1명), 수녀 96명, 대신학생 13명, 소신학생 19명이 있었으며, 여자중고교 1개, 초등학교 1개, 유치원 1개, 고아원 3개, 병원 2개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61만 명의 인구에 신자 수는 2만 3천여 명, 즉 복음화율은 3.77%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 현재 복음화율 9.94%는(2006년 말 기준) 인천교구 50년 역사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정리: 홍보실, 참고자료: 인천교구사>



왼쪽위) 인천 대목구 설정 및 나길모 주교 교구장 임명에 관한 교황청 공문(1961. 6. 6)
아래) 인천 대목구 주교구(Diocese) 설정 공문(1962. 3. 10)
오른쪽) 초대 인천교구장 나 길모 굴리엘모 주교

지난주까지 제1부 인천교구 전사- 교구 설정 이전에 인천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전해진 이야기부터 박해시대의 순교자, 지역의 발전, 본당 설립, 교구설정의 배경 등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번주부터는 제2부 인천교구 본사- 1961년 인천교구 설정, 나 주교의 착좌부터 50주년이 되기까지 인천교구의 성장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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