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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인천교구내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소사 본당

by 세포네 2007.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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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내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소사 본당

1946년 설립된 소사본당은 인천교구내 100여개 본당 중 답동본당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33년 공소로 설립되어 10여 년간 공소예절을 지켜온 신자들은 해방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되자 신부님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시자는 의견을 모았다. 이때 앞장섰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당시 휘문학교 교사였던 시인 정지용이다. 정지용 프란치스코는 소사3거리 은행나무 부근에 살던 아주 열심한 신자였다고 한다.  

노기남 주교는 신부님을 보내달라는 신자들의 간청을 들어주었고 소사공소는 1946년 부천지역 첫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성탄과 부활 때에는 하루 전날부터 신자들이 모여들어 수녀원과 강당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미사를 드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소사성당 초기 성전은 현재 소명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당시 주임이었던 신성우 신부와 신자들은 손수 벽돌을 쌓으며 6개월 동안 새 성전을 완공하였다. 이때 건축한 성전은 현재 소명여고 학생들의 성당으로 남아있다.

소사본당에서의 많은 사목활동뿐만 아니라 소명여고를 설립하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신성우 신부는 소사본당의 주보인 성가정 상을 봉헌할 것을 유언하였고, 1978년에 세운 성가정상은 지금도 성당 등나무 옆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본당 터와 그 일대가 복숭아밭이었다고 해서 복사골 본당으로도 불리는 소사본당, 60년이 넘는 역사를 대변하는 것으로는 1960년에 건축한 현재의 성당과, 나무 제대, 1958년 설립되어 지난주에 2780차의 주회를 맞은 하늘의 문 쁘레시디움 등이 있다.

정지용을 비롯한 30여명 신자들의 노력으로 설립된 소사본당은 부천지역 초기 신앙 공동체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고, 이후 삼정동, 심곡, 심곡본동, 원미동, 역곡, 소사3동 등의 본당을 분가시켰다.

 

사진)

좌 - 1947년 부활에 견진성사를 받은 68명의 신자들. 가운데가 노기남 주교.
우 - 6.25로 파괴된 본당을 신축하고 있는 신성우 신부(중앙 우측)
아래 - 성가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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