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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26. 도서 지방의 교세 증가

by 세포네 200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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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도서 지방의 교세 증가

 

본당·병원·학교 설립 등 내륙에서 활발한 가톨릭 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도서 지방에서도 꾸준한 교세 확장이 있었다.

1958년 강화본당을 시작으로 연평도(1959년), 백령도(1959년)가 본당으로 설정되었고, 1961년 인천교구 설정이후 영종도(1965년), 덕적도(1966년)에도 본당이 생겨났다.

백령도는 1880년 11월 2일 뮈텔 주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올 때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유서 깊은 곳이다. 8·15 해방 전까지는 겨우 4-5명의 신자뿐이었지만 한국 전쟁 이후에는 60여명으로 늘어났다. 1954년 1월 17일 노기남 주교의 방문으로 15명이 견진성사를 받았다. 55년 8월 방문 때에는 백령도에 근무하고 있던 해병 장교들도 함께 견진성사를 받았다.

1955년 8월 노기남 주교는 당시 섬지역 중에서 신자수가 가장 많던 연평도를 사목 방문하였다. 그러자 8년 동안 주교를 만나지 못했던 60여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견진성사를 받았다. 1956년 가을, 다시 연평도를 찾은 노기남 주교는 교우들에게 사제관을 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신자들은 재료비만 100만 환의 경비를 모아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1957년 10월 연평도의 교우는 422명의 영세자와 700여명의 예비 신자가 있었는데, 이는 연평도민의 1/3이나 되는 숫자였다. 그리고 연평도 앞바다에 있는 소연평도에도 공소가 신설되었는데 신자수가 45명이었다. 연평도는 58년 강화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고, 강화 주임 장금구 신부의 방문때마다 300명이 넘는 예비자가 세례를 받는등 꾸준히 신자가 증가하여 1959년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1970년대에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신자수가 감소하여 1975년 11월 25일 덕적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지만 여전히 높은 복음화율을 유지하였고, 1989년 말 기록에는 주민수 대비 48%의 복음화율을 기록하고 있다.

강화본당은 1958년 2월 4일 설립되었다. 260여명의 교우가 있었고 초대 주임으로 장금구 신부가 부임했다. 그런데 강화 지역에는 여러 교파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천주교인은 피난민까지 합하여 몇 백 명이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으나 그 존재를 서로 알지 못했다. 1957년 서울에서 장위창 요한 전교회장이 강화도의 교우들을 방문하여 강화도, 삼산도, 교동도를 순회하면서 전교한 결과 약 400여명이 교리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1958년 부활 때 성공회로부터 개종한 신자 12명을 포함하여 73명이 영세, 입교하였다. 본당 설정 후에는 주일이 되면 성공회 교회보다 천주교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많은 사람이 매일 저녁에 열리는 교리 강좌에 참석했다. 강화도 전체로는 1958년 약 1,000여명의 예비자가 있었다.

이처럼 내륙뿐만 아니라 도서지방의 신자 수 증가는 인천감목구의 설정을 앞당겼고, 1961년 교구 설정 이후에도 영종, 덕적 본당과 관할 공소들이 꾸준히 생겨났다.
<정리:홍보실, 참조:인천교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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