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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교리]/다시보는인천교구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 일가가 살았던 도화동본당

by 세포네 200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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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 일가가 살았던 도화동본당

도화동본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서울에서 내려왔던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 ‘박순집(베드로)’ 일가가 살았던 곳으로 한일합방 이전에는 ‘쑥골’이라 일컬어졌다. 

박순집은 1890년 제물포에 정착한 후 1893년 자신의 집터가 경인전철 부지로 편입되자 주안 쑥골(현 남구 도화동)에서 터를 잡아 생활했다. 1911년 6월 27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답동본당의 초대 주임 빌렘 신부를 도와 인천교구 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박순집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서 2001년 5월 24일 도화동본당을 거쳐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과 강화 갑곶 순교성지와 인천가톨릭대학교에 각기 묻혀있다. 

도화동본당은 1960년 7월 17일 민 예로니모 신부가 초대 신부로 임명되고 본당 대지 안에 있던 자그마한 한식 초가집을 임시 사제관 겸 사무실로 사용하고 박문여고 본관 2층 교실 3칸을 빌려 미사를 집전하며 설립되었다. 신자들은 성전건립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기성회를 조직하고 기성회원들은 방명록을 들고 가정 방문을 시작, 1년 동안 약 150만원의 신축 기금을 모았다. 대지 정리를 위해 산을 깎는데도 3개월 이상이 걸렸고 공사중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민신부와 신자들은 작은 돌 하나도 물에 닦아 사용할 정도로 정성과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63년 4월 25일 나주교님의 주례로 본당축성미사가 봉헌되던 날, 1,500여명의 신자들은 그동안의 수고와 하나됨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산기슭 외딴 초가집에서 옹기를 굽고 생활하며 교회사업에 몰두하던 ‘박순집(베드로)’일가의 생활 터전위에 세워진 도화동본당은 10명의 사제를 배출하였고 2010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기 위하여 아추만, 현아만, 미향만이라는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본당의 아름다운 과거 역사를 발굴·정리하고 새로운 미래의 교회 방향을 모색하고자 신자들이 한마음이 되어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다지고 있다.

사진 왼쪽 위) 1963년 4월 25일 도화동본당 축성미사
오른쪽) 현재의 도화동 본당 모습
아래) 박순집 유해를 절두산에서 도화동본당으로 옮기는 장면(2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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